나이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른다움에 대하여...
이 말은 언젠가 들었을 때보다, 마흔을 넘긴 지금이 되어 더욱 깊게 와닿는다. 어릴 적엔 ‘어른’이라는 말에 무게를 느꼈다.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고, 뭐든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모르겠는 게 많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 모름을 감추지 않고 감당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종종 ‘나이’를 어른의 증명서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숫자가 쌓인다고 사람이 깊어지는 건 아니다. 어른다움이란, 나이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겪어냈느냐의 문제다. 일상의 말들을 어떻게 듣고, 얼마나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가 진짜 기준이다.
겪어봐야 안다.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지,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병든 이의 손을 잡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겪어봐야만, 말이 아닌 침묵으로 배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마흔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중년'이라는 말이 붙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어른 취급을 받는 나이다. 이쯤 되면 나이나 학벌 같은 외적 조건은 점차 관계에서 의미를 잃어간다. 예순 넘은 어르신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고, 때로는 존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인간관계의 시작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스무 살 무렵, 누군가를 '형'이라 부르며 형제가 되고, '누나'라 부르며 어색함을 녹이던 그 시절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마흔을 넘기면, 그렇게 가볍게 사람 사이를 좁히기 어렵다. 나도, 타인도, 서로의 인생이 너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나이쯤 되면 진짜 친구가 새롭게 생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내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줄 사람은, 이미 인생 전반부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만나기 어렵다. 모두가 서로의 짐에 눌려, 누군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여유조차 갖기 어려운 시기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한 건 ‘말과 행동의 무게’다. 마흔 이후의 말은, 그저 말이 아니다. 어른의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실수를 했을 때 “그건 내 잘못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간에, 내가 뱉은 말과 행동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그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너무 자주 마주하게 된다.
TV에서 대선 후보 토론을 보았다. 정치에 큰 기대는 걸지 않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펼치는 논쟁이라면 적어도 ‘어른’ 다운 말들이 오고 가야 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건 토론이 아니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명백한 혐오 표현, 상대를 깎아내리는 말들이 난무했고, 마이크를 쥔 이들의 얼굴은 어른이기보다는 화난 아이처럼 보였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진짜 어른인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무너뜨리려 하고, 자신의 오류에는 눈감은 채 남의 실수만 들춰내며, 자신이 한 말의 파장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화면을 껐다. 어른의 자격은 권력이나 학식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어른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과연 무엇을 배울까.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른의 행동을 따라 할 뿐이다. 그래서 어른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이웃, 상사로서, 아이들의 거울이 되고 있는가.
진짜 어른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실수를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사람, 남을 이기려 하기보다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그런 어른이, 이 나라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말 그렇다.
어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