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3 –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

죽은 자로 취급된 이들에게 건네진 가장 낮은 진실

by 나그네 한

언젠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이 웅성였다고 했다. 바람은 탁했고, 흙먼지는 발목보다 높이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전해졌다. 예수가 성전 가까이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던 시간이었다. 말씀을 전하던 그의 입 주변은 조용히 다물어졌다가 이따금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다시 열렸다. 바로 그때, 평소에도 예수를 달가워하지 않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사두가이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이름을 여러 기록에서 접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고, 율법을 붙들고 살되 오직 오경, 곧 모세오경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 여긴 이들이었다. 어떤 예언자도, 시편도, 다른 율법도 그들에게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천사도, 귀신도, 부활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 땅의 질서와 시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그런 그들이 그날, 예수 앞에 서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모세가 이렇게 기록했지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를 맞아 형의 후손을 이어주어야 한다고.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고, 맏이가 먼저 죽고, 둘째, 셋째… 결국 일곱이 모두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식 없이 죽었소. 마지막에 그 여인도 죽었지요. 그렇다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돌았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어떤 이들은 입가를 비꼬며 사두가이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고 했다. 그들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부활이라는 주제를 꺼낸 이유는 명확했다. 예수가 믿는 그 ‘다음의 세계’를, 부활이라는 개념을 그들의 손 안에서 무력화시키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 속에는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삶이 배제되어 있었다. 일곱 남자를 잃은 한 여인. 그 여인은 그저 논쟁의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단지 누군가의 아내로 반복되다가 사라진 존재. 누구도 그녀의 고통이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이 질문은 잔인했다. 믿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채 논리의 칼날을 뽐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논리 뒤에 숨은 허망함을 꿰뚫어 보고,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대답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 곧 죽은 자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들 지도, 시집가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 부활 이후에도 외로움이 남는 삶인가? 그러나 예수는 이어 말했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천사들과 같아져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나는 이 말을 전해주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게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며, 결혼하지 않는 삶이란...”


그 사람은 오래된 연장을 손에 쥔 채 말했다.


“글쎄,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분이 말한 건... 지금 우리가 아는 삶과는 아주 다르다는 거지. 누군가를 통해 내 이름을 남기고, 혈통을 이어가야 했던 이 땅의 방식이 거기선 통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무언가 가슴이 저려왔다. 혈통, 계보, 후손… 그 모든 것에 매달려야 했던 한 여성의 삶. 잇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두려움. 기억되지 않는 이름. 그러나 예수가 말한 그 ‘다음의 삶’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 한마디가, 사두가이들이 만들어낸 덫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모세도 떨기나무속에서 하느님을 이렇게 불렀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다.”


사두가이들이 오경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그들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내놓았다. 그들이 그토록 붙들고 있는 모세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스스로를 산 자들의 하느님이라 밝히셨다는 것.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예수는 지적했다. 이 말 앞에선, 부활을 부정할 근거가 사라졌다.


그 장면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어떤 율법학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소. ‘잘 말씀하셨소’라고... 마치 오랫동안 헷갈렸던 마음의 매듭이 풀린 사람처럼 보였지. 그리고 아무도 더 묻지 않았어.”


사두가이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들고 온 논쟁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남은 것은, 그 논쟁을 통해 드러난 그 여인의 이름 없는 삶이었다. 부활의 논쟁 한가운데에서 도구처럼 사용되었던 그 사람. 누구도 그녀를 위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그녀의 삶이 천사의 것과 같다고 말해주었다. 죽지 않고, 이름도 사라지지 않는 삶. 더는 반복되는 상실과 강요된 운명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


나는 그런 장면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누군가의 손에 들린 율법이 때로는 사람을 누르고, 어떤 논쟁은 사람의 이름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사라진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었다. 비록 그 여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언은 그녀에게도 닿아 있었을 것이다.


그날, 예루살렘 성전 뜰의 한편에서 일어난 그 짧은 논쟁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더 오래 남은 것은, 부활이 있음을 통해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을 드러내셨던 그의 목소리였다. 말보다 깊은 진실은 늘 조용한 가운데 피어난다.





논쟁이 끝난 듯 보였지만, 예수는 멈추지 않았다. 사두가이들이 물러간 자리, 아직 그 주변엔 사람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웅성거리고 있었고, 예수의 대답에 감탄한 율법학자들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예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그 말은 예상 밖이었다. 대답을 기다린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향한 말이라기보다는, 넌지시 던져진 질문처럼 들렸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주변은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야,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소?”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오. 그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은 것이오.”


한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는 그날 시장에서 물건을 팔다가 우연히 그 무리에 끼게 된 이었고, 평생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스쳐갔다고 했다. 그 역시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의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의 혼란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윗 자신이 시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그 말씀은 많은 이들이 아는 시편의 한 구절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인용하자, 그 구절이 낯설게 들렸다고 했다. 익숙했던 말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낯설게 들려올 때 사람들은 순간 멈칫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젊은 제도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잠깐만…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라 부른 거잖아? 그렇다면… 메시아는 다윗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말인데...”


그는 입을 다문 채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마치 오래된 벽에 쓰인 글자를 다시 읽듯, 그 말의 뜻을 조심스럽게 음미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올 거라고 믿어왔다. 그 믿음에는 오랜 기다림이 담겨 있었고, 다윗의 왕권처럼 메시아도 이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거라는 희망이 들어 있었다. 그 희망은 때때로 무기가 되었고, 때때로 기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는 지금, 그 믿음에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라 불렀다면, 어찌 그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이 장면을 이야기해 준 한 사람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말이 나오자, 무언가 내 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소. 내가 갖고 있던 메시아의 그림이 산산이 흩어졌지. 내가 기다렸던 메시아는 어쩌면… 내가 만든 허상이었는지도 모르오.”


그는 긴 시간 동안 두 손을 모은 채 그렇게 말했고, 그날 이후 자신이 기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예수가 말한 그 메시아는, 땅의 힘이나 왕의 혈통을 따르지 않는 존재였다. 다윗보다 위에 있고, 심지어 다윗이 “내 주”라 부르는 이. 다윗이 존경을 담아 부른 그 이름. 그것은 한 사람의 신념이나 민족의 기대를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예수는 시편의 구절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단순한 비유로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오래된 관념을 뒤집었다. ‘왕이 왕을 부른다’는 말의 파장은 컸다. 특히 그 왕이,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한 왕 다윗이라면 더욱 그랬다.


어떤 이들은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더는 예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날부터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 땅의 왕위나, 혈통이나, 무력의 방식으로 오지 않는 메시아... 이미 하느님 곁에 앉아 있는 ‘내 주’. 그들이 알던 메시아의 틀에 갇히지 않는 존재...


그 구절을 되뇌던 이들 중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기도의 대상이 달라졌소. 이름은 같았지만,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고, 기대하는 것이 달라졌지.”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부활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된 예수의 말은, 이내 메시아의 정체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다윗이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편 속에서 이미 말하고 있었다.


“내 주여.”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두 글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보다 더 또렷하게 메시아의 깊이를 말해주는 증언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그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그가 다윗이 ‘내 주’라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었다. 말은 조용했지만, 그 침묵의 무게는 사람들의 심장을 건드렸다. 믿고 있었던 것들이 흔들릴 때, 사람은 생각을 멈추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그 틈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쌓아온 확신의 벽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등을 돌렸을까.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들은 것은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느꼈다. 예수가 말한 그 한 문장이, 몇 사람의 마음속 오래된 도장을 깨뜨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조용한 균열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날 그 뜰에서 일어난 마지막 장면을 들려준 사람은, 시장 골목에서 작은 양피지를 파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에 살아왔고, 여러 해를 성전 주변에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그에게 그날은 무언가 오래된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은 제자들에게 향했지만, 동시에 성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관통했다. 바람이 잠잠해졌고, 사람들의 입술이 다물어졌다고 했다.


“율법 학자들을 경계하라.”


그 한마디에 웅성임이 멎었다. 누군가는 마른침을 삼켰고, 누군가는 손끝을 움찔했다. 율법 학자들, 서기관들.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들이며,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던 이들.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지금, 그들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즐긴다.”


그 말에 어떤 이가 말했다.


“맞소. 회당에 올 때마다, 언제나 그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 옷자락에 달린 술은 늘 반짝였고,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갔소.”


그 말에 나는 묻고 싶어졌다. 그 옷의 무게는, 과연 무엇으로 짜인 것이었을까. 사람들의 존경인가, 하느님의 뜻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덮으려는 욕망이었을까...


예수는 말을 이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한 노인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고 했다. 그는 늘 회당에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시장에서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허리를 굽혔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그는 무언가 거짓된 무대의 막이 내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의 자리는 언제나 높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작아 보였다고...


그 장면을 그려본다. 겉옷을 걸친 이들이 성전 한편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이들이, 어느 순간 조용히 제자리를 잃어가는 듯한 풍경. 예수의 말은 점점 깊어졌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는 길게 한다.”


이 말을 전해준 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는 한때 회당에서 가장 성실하게 헌금을 하던 이었고, 어느 해 겨울에 모든 재산을 팔아 바치고는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했던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여인은... 그저 믿었던 거요. 율법에 따라 살면, 하느님이 갚아주신다고. 그런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끝내 그 헌금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모른 채 세상을 떴소.”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 한편이 무거워졌다. 기도가 길다는 이유로 존경을 받았던 이들, 하지만 그 기도가 누군가의 삶 위에 세워져 있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도가 아니었다.


예수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그의 시선은 분명히 거기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존경을 먹고살며, 가난한 이들의 삶을 가볍게 여겼던 자들. 그들의 기도는 하늘이 아닌 사람들의 눈을 향해 있었고, 그 손은 하느님을 향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그 한마디는 짧았다. 하지만 긴 침묵을 낳았다. 단죄. 그 말은 단지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 앞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들, 그 껍질이 벗겨지고 남은 나약함과 욕망의 알몸. 그것이야말로 단죄였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기록하며 생각했다. 누군가의 겉옷이, 긴 기도가, 높아 보이는 자리가 우리를 안심하게 만들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는 그 모든 것 뒤에 숨은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 마음이 얼마나 사람을 속이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가렸는지를...


예수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들은 오히려 속삭임보다 조용했고, 그렇기에 더 크게 울렸다. 그 말 앞에서 침묵한 자들이 있었고, 등을 돌린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마음 깊이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날, 성전은 더없이 조용했다. 사람들은 떠났고, 말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걸으며,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 그 낮은 목소리를 기억한다. 겉옷보다, 기도보다, 자리보다 더 깊은 것을 보셨던 사람. 그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겉옷 아래 숨겨진 욕망을 조용히 비추고 있을지 모른다.





물소리도 닿지 않는 성전의 돌길에서,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기록 속에 이름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논쟁의 중심엔 그녀가 있었다. 일곱 번 아내가 되고, 일곱 번 남겨진 채, 마지막엔 질문 하나의 모양으로 소비되었다. 그 질문이 진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누군가는 믿음의 척도로, 누군가는 말장난으로 그녀의 인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삶은, 한 번도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는 달랐다. 그는 그 여인의 삶을 논쟁의 도구로 남겨두지 않았다. 이름조차 지워진 사람을 향해 ‘하느님의 자녀’라 불렀다. 죽지 않는 존재, 천사와 같다고. 그 말속에서 무너지는 한 세계가 있었다. 혈통, 법, 질서… 사람을 감추는 모든 겉옷들이 그 말 앞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또 하나의 말이 있었다.


“내 주여.”


다윗이 그렇게 불렀다는 예수. 그 말 한마디가 오래된 믿음을 부드럽게 부수었다. 누구를 향해 무릎 꿇을 것인가, 누구를 다시 불러야 하는가.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들리는 그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다면, 그것도 은혜일 수 있겠다.


그리고 끝에 남은 말...


“그들은 긴 기도를 하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


그 말에는 누구보다 아프게 울리는 하느님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더 조용했고, 더 단호했다. 사람들의 존경이 쌓여 있던 자리에, 예수는 참된 무게를 내려놓았다. 그 말은 누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속지 말라는, 더 이상 감추지 말라는, 조용한 외침이었다.


예수는 언제나 이름 없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자가 아니라, 침묵하는 자를. 겉옷의 길이가 아니라, 그 안의 마음을. 그가 바라본 세상은, 다른 눈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 눈이, 지금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20:27-47"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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