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의 음표, 나이 든 내가 듣는 이야기
20대 초반, 나는 처음으로 현대 클래식 음악을 접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클래식을 즐겨 들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낯선 영역으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접한 현대음악은 내가 알고 있던 클래식과는 전혀 달랐다. 익숙한 화음은 사라지고, 괴상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불협화음, 무조(無調), 심지어 박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무형의 흐름.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음악이라기보다 하나의 실험 같았고, 어떤 곡은 거의 소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다시 듣고 싶어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들끓었고, 작곡가가 표현한 그 독창적인 ‘소리’는 내 마음속 어딘가를 계속 자극했다. 그렇게 나는 쉔베르크, 리게티, 슈톡하우젠, 펜데레츠키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 무렵, 독일에서 활동했던 한 한국인 작곡가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바로 윤이상.
그는 독일 국적을 가진 한국인 작곡가로, 현대음악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독일에서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던 인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 전만 해도, 현대음악은 한국 사회에서 낯설고 어려운 음악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앞선 1960~70년대, 한국의 한 작곡가가 유럽 무대에서 작곡가들을 가르치고,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에서 오페라를 위촉받고, 서양 악기를 통해 동양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했다.
윤이상이 독일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한국과 동양의 정서를 서양의 언어, 서양의 악기로 풀어냈다. 그 낯설고 아름다운 조화는, 당시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낯섦에 끌려들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아내 이수자 여사가 쓴 『내 남편 윤이상』이라는 책을 찾아 읽었다.
그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었다. 윤이상이 평생 동안 남긴 일기와 독일 유학 시절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로 엮인 이 기록은, 예술가의 삶을 넘어 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다큐멘트였다. 그는 화려한 무대 위의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내와 자녀를 그리워하는 지극히 따뜻한 남편이었고, 고국을 애타게 그리던 ‘조국의 아들’이었다. 평범하지만 진실했고, 멀지만 친숙했다.
그렇게 20대의 나는, ‘윤이상’이라는 인물을 통해 음악을 넘어 삶과 철학에 눈을 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40대가 된 지금, 그는 내게 추억의 이름이자 여전히 유효한 질문의 중심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아주 우연히 소셜 미디어에서 3부작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윤이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의 삶을 회상했고, 여러 연주자들이 그의 곡을 다시 연주했다. 나는 영상 속 음악을 들으며 깜짝 놀랐다. 20대 시절에는 그토록 난해하게 느껴졌던 그의 음악이, 이제는 너무도 명확하게 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선율 없는 선율, 음표 없는 감정, 그리고 단단히 눌러 담긴 어떤 ‘한’의 정서. 그것이 이제는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마도 나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동양의 정서를 단순한 문화적 배경이 아닌 나의 내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안에서 ‘소리’가 아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윤이상이 40~50대에 작곡한 곡들 속에는 지금 내 나이에서 공감할 수 있는 고민, 외로움, 염원, 회한 같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소리 하나하나가 말처럼 들렸다. 그 말들이 참 반가웠다.
시대는 변했지만,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의 음악이 새삼스럽게 낯익게 들리는 이 순간, 나는 문득 질문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은 내게 음악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누구나 이 질문 앞에 설 수 있다면, 삶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이상의 음악은 그래서 내게 다시 ‘추억’이 아닌 ‘현재’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의 음악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내가 어떤 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남길 수 있을지를 다시 묻는다.
오늘 나는 다시, 윤이상의 음악을 꺼내 듣는다.
그의 이야기와 나의 삶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첨부: 3부작 '윤이상을 넘어서'
https://youtu.be/3PMLDS0olx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