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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 조용한 떨림, 쇼팽을 듣다

조성진의 Nocturne Op.9 No.2와 함께한 감정의 시간

by 나그네 한

조성진의 쇼팽, 그 첫마디의 떨림에서 시작된 이야기 – Nocturne Op.9 No.2


클래식 음악에 대해 글을 쓰자고 마음먹은 날, 나는 제일 먼저 이 곡을 다시 꺼내 들었다.


조성진이 연주한 쇼팽의 Nocturne Op.9 No.2,

한밤중의 적막을 뚫고 피아노의 첫 음이 조용히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이미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고, 어떤 단어도 이 감정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왜 하필 이 곡일까. 왜 하필 이 연주일까.


쇼팽은 워낙 많은 작품을 남겼고, 나도 그중 수많은 곡을 사랑하지만, 이 곡은 마치 쇼팽 자신이 직접 내 옆에서 연주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조성진의 손끝에서 나는 쇼팽의 침묵을, 그리고 그가 말하지 못한 고백을 듣는다. 그래서 이 곡은, 첫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곡 해설 – 침묵과 떨림으로 노래한 내면의 독백


이 곡은 단순히 ‘예쁜 멜로디’를 위한 야상곡이 아니다. 젊은 쇼팽이 20대 초반에 쓴 이 곡은, 이미 말보다 음악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깨우친 이의 섬세한 고백이다. 형식은 론도지만, 조성진의 연주를 듣고 나면 어떤 분석도 덧붙일 수 없을 만큼 이 곡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흐른다.

E♭ 장조의 첫 테마는 마치 누군가를 조심스레 불러보는 손짓 같고, 한 음 한 음이 떨어질 때마다 마음속 오래된 기억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중간부에 들어서며 선율은 점차 부풀어 오르고, 페달을 딛는 깊은 울림은 곡의 중심에 숨은 긴장과 고백을 더한다.

이 곡에서 쇼팽이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름다움 너머의 깊고 아득한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듣기 무서울 만큼의 감정 – 조성진의 쇼팽


https://www.youtube.com/watch?v=tTGEo3scnq8

조성진의 녹턴 (Seong-Jin Cho, Chopin: Nocturne, Op. 9: No. 2)


나는 이 연주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긴장된다. 어딘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내 안에서 자꾸 드러나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는 이 곡을 혼자 듣는 게 무서울 정도다.


조성진은 이 곡을 단순히 연주하지 않는다. 그는 곡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손끝은 단순한 음이 아니라, 숨결을, 흔들림을, 고백을 말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극도로 조심스럽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숨을 멈춘 듯한 집중력으로 몰아간다. 특히 마지막 페르마타에서 멈춰 선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일 때— 그 작은 ‘쉼’ 하나에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그의 쇼팽은 완벽해서 감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어서, 너무 아파서, 너무 진실해서 나는 늘 조용히 듣는다.



이 곡이 나에게 말해주는 삶 – 감정을 견디는 법


사람은 때로 감정이 너무 커서 그것을 말로 꺼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술을 찾아간다. 말 대신 음악으로, 음악 대신 침묵으로. 쇼팽의 이 곡은 나에게 ‘견디는 감정’의 음악이다. 폭발하지 않고도 진실할 수 있고, 눈물 흘리지 않아도 슬플 수 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건넬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조성진의 연주는 이 진실을 너무나 조용히, 하지만 너무도 깊게 건넨다. 그가 들려준 쇼팽 안에서, 나는 삶의 애매함, 감정의 모호함을 굳이 해석하거나 해결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용기를 배운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다시 꺼낸다.

내 감정이 말이 되지 않는 날에도, 그저 이 곡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음악이 말해주는 대로 조용히 마음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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