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리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초대형 베스트셀러.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2010년 이후 전 세계에서 이 책만큼 화제가 되었던 책이 있었을까? 내가 사피엔스를 처음 듣게 된 것은 몇 년 전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때 베스트셀러 작가인 어느 역사학자가 자신의 책에서 '제국주의'를 옹호한다는 사람들의 비판에서부터였다. 하지만, 그의 책은 그러한 비판을 뒤로하고 한국에서 엄청나게 팔렸고(팔리고 있고) 지금도 수많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의 책에 관한 리뷰, 서평을 통해 화제 되고 있다.
첫 느낌? 이건 상식을 뛰어넘는데..? 그런데 너무 재밌어.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에 대한 수만 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기술했다. 600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책. 보통 이런 류의 책은 수면을 돕기 위해 읽거나 집에 방문한 손님들에게 나를 뽐내기 위한 '손님 제압용'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책의 서론을 읽는 순간부터 처음 잠을 자야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끝까지 빠져들게 했다. 저자의 직설적인 필체 그리고 탁월할만한 그의 문학적 감각이 책 가운데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를 지탱하는 세상을 걱정하는 저자의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물론 번역가의 탁월한 번역도 한몫을 차지할 것이다.
저자는 인류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인간의 역사를 보통 일반인의 상식을 깨고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역사를 읽어냄으로 나의 흥미를 일으킨다. 그것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진화, 정치, 경제, 종교 심지어 심리까지 겸비한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과 그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가는 저자의 문학적 탁월함이 아주 돋보인다. 취미로나마 글을 쓰는 나에겐 정말 본받고 싶은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간략하게 훑어보기
책은 총 4부로 되어 있다. 저자는 인지 혁명, 농업혁명, 인류 통합 그리고 과학혁명의 순서로 책을 기술했다. 1부 '인지 혁명'에서는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사피엔스가 다른 호모들에 비해 선척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열악함에도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사피엔스들 간의 의사소통(험담?, 뒷담화?)을 했기 때문으로 본다. 사피엔스는 의사소통을 하며 협력을 할 수 있었으며 그 조직력으로 자신과 다른 종들을 멸종시켰다.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주변 대부분의 것들을 짓밟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잔혹성은 2부 농업 혁명에서 더 강해진다. 현재 인류 역사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문명의 시작을 농업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풍요의 축복으로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농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대 사기극이라 말한다. 농업은 수렵채집보다 편하고 풍부한 양식을 기대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농업이 커짐으로 인류는 물질적 풍요에 따른 삶과 달리 한 곳에 정착하게 됨으로 정작 인구증가, 전염병, 미래에 대한 걱정(날씨 등)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그들은 수렵채집을 하던 시대보다 더욱 바빠졌으며 과거와 같은 안락한 삶 역시 포기해야만 했다. 또한,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로 나누어지면서 사회의 불평등을 가져왔다.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들은 종교, 신화를 만들어 불평등을 정당화했으며 사회의 계급을 만들어 냈다. 이처럼 농업혁명은 인류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은 동물에게도 미쳤다. 농업으로 인해 가축 당하는 동물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사가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농업 혁명은 자연스럽게 3부의 '인류 통합'으로 이어진다. 인류는 농업혁명 이후 동물과 다르게 혈연관계가 아닐지라도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통합(협력의 네트워크)'을 이뤄낼 필요가 있었다. 저자는 인류 통합의 원동력을 화폐, 제국, 종교로 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실제 하지 않지만 인간은 화폐, 국가, 종교(다신교, 일신교 사상뿐만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도 포함된다)가 현실 가운데 실제 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통해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로 인해 차별, 불평등, 전쟁,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탄생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4부에서 '과학혁명'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과학 혁명은 계속되어 가고 있다. '과학'은 인류 스스로가 '무지(無知)'를 인정함으로 발전한다.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알아감으로 서로 경쟁함으로 발전해나간다. 그리고 그 과학의 산물은 대체로 '자본주의'로 발전한다. 모든 국가 그리고 사람들이 경제발전과 성장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 것이다. 그 안에는 수많은 범죄와 악행이 존재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아래 경제 성장만 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덮을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앞으로의 미래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과학혁명으로 인해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 말한다. 과학혁명의 이야기를 마친 저자 유발 하라리는 결론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인류는 과연 행복한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는 그렇게 이제부터 우리 인류의 질문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닌 무엇을 원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말하며 책을 마친다.
내 마음대로 읽고 이해하기
차별을 만들어낸 자기들만의 '공감(共感)'
밀 농사를 하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오래된 벽화다. 4000-5000년 전 신분이 낮은 많은 사람들은 파라오와 소수의 귀족들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단함은 이집트의 종교와 신화로 포장된 불공평을 당연히 여겼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다신(多神)'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파라오 그리고 귀족들은 자신들을 땅 위의 어떠한 존재보다 존귀히 여겼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불평등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그 불평등이 종교 그리고 신화라는 상상의 산물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불평등 그리고 종교가 상상의 산물로 인정하는 순간 그 사회구조는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미국의 드리마 '지정 생존자'를 리메이크하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의 여러 장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 "사람은 늘 차별을 원하는 존재이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맞서 반대파 정치인이 했던 말이다. 그 배우의 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는 차별을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은 차별을 원하는 존재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차별이 존재하기에 누군가는 누구의 위에 존재할 수 있다. 차별이 있기에 누군가는 누구보다 부를 축적하며 살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다른 이가 자신보다 열등해야 특정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말은 직접 할 수 없지만 사람의 깊숙한 곳에 가득한 욕망이다. 이러한 불평등과 차별을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바로 불평등의 원천은 '공감(共感)'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 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 45
뒷담화? 험담? 난 이것이 서로 간의 '공감'에서 온다 생각한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공감이 되기에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인류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필요가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감을 주고받고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고 싸웠다. 종교, 신화, 국가,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상상의 산물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상의 산물은 불공평, 차별, 폭력을 정당화하게 했다는 저자의 말은 많은 부분 납득할만하다. 우리는 그 불공평과 차별을 기반으로 우리와 다른 종을(동식물 등) 통제하고 멸종시킴으로 수만 년 동안 발전해왔다. 우린 이 세상에서 누구도 건들지 못할 Supermen/women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린 같은 사피엔스 그룹 안에서도 과거에 비해 육체적 죽음과 폭력이 계속 줄어들지라도 지금은 그와 못지않은 다른 방식으로 불공평과 차별이라는 폭력을 더 키워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린 현재 무엇을 위해 사는가?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은 사회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난 지금 더욱 발전해가고 변해가는 이 사회를 보며 "그래! 지금 세상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렇게 태어나고 그냥 그런 걸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독자에게 '낙관주의'를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인류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시기부터 과학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까지 인간의 이기심과 잔혹성은 변하지 않고 오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할 것을 제언한다.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p. 585
인간은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hope과 doing'의 삶을 기대하며 산다. 그리고 더욱 성인이 되어갈 때마다 사회로부터 'being'의 삶을 더욱 요구받는다. 나에게 있어서 'being'의 인생을 생각하며 문득 떠올리는 말은 '희생(self-sacrifice)과 책임(responsibility)'이다.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희생과 책임은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doing'를 외치는 사람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우리 인류가 'hope'과 'doing'를 스스로 질문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은 누구나 원하는 것만을 하며 살 수 없지만 그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을 소망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평등'과 '존중' 그리고 '착한 공감'이 상식이 될 수 있다.
결론: 아주 좋은 책이다. 기독교인이 읽어도 좋을 만큼.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신론 그보다 더한 유일신 종교를 가진 난 그의 글들을 보며 미쳐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알게 한다. 한 명의 종교인으로서 나 역시 세상을 갇혀있는 종교의 교리 틀 안에서 세상을 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씩 종교의 틀 안에서 벗어나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종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상을 듣고 배울 수 있다.
기독교의 교리는 초월적인 유일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사피엔스)을 창조함으로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생명체로 정하였다 말한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인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비록 기독교 교리 안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수많은 고발이 있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실제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난 사피엔스의 책을 보며 기독교 교리에서 '죄'라 규정 짖는 인간의 이기심, 이타심, 폭력성 그리고 불평등성의 실제를 찾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죄들)은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이 아닌 (종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이다. 그래서 이 책은 유신론자는 유신론 자대로 무신론자는 무신론자대로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인간 역시 어떻게 발전,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많은 종교인들도 이 책을 읽으며 종교를 통해 각자 믿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고민들을 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 신앙 그리고 가치관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