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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Apr 18. 2024

아이티와 누룽지

요즘 아이티 사태를 보며 예전 생각이 났다   

요즘 어려운 나라가 한 둘이 아니지만, 아이티 소식만 들으면 먹먹해진다.


2000년 여름 필자의 가장 큰 고객사 임원이 매니저들을 이끌고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상견례 겸 상반기 사업실적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당시 이 고객은 세계 전자업계의 대기업인 데다 회사 거래물량의 95%를 차지하고 있어 전사적으로 대응책에 부심하고 있었다.


지금은 흑인 중에서도 고위직에 진출한 예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수가 훨씬 적었다. 흑인이라는 불리한 처지 가운데 승승장구한 그는 예의 날카로운 지적과 논조로 우리를 수세에 몰았다.


그러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인 약 일 년 뒤 그가 같은 목적으로 다시 방문했다.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졌지만 협력업체를 관리하는 입장이라 의견차이가 있었고 약간의 앙금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회사에 고객 전담 기사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차를 몰아 그와 함께 한국 민속촌에 갔다. 관광지를 둘러보기 전에 입구 오른편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면서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화제 가운데 하나가 민속촌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한복차림의 젊고 예쁜 여자 이야기도 나왔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의 정확한 색상은 물론 코와 입술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하며 필자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교정해 주었다. 그의 관찰력이 놀랍다고 느꼈다.


돌솥 밥의 밥을 덜어내고 밑바닥의 누룽지를 보면서 그가 뜻밖에 자신의 출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는아이티 출신 미국인으로 자신도 과거에 쌀밥을 먹어 누룽지에 익숙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티 사람들도 쌀이 주식인 것을 알았다.


그 뒤 아이티는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의 피해가 여러 번 있었지만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만한 뉴스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년에 세계 소식을 전하는 TV의 한 프로그램이 아이티의 실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시청하면서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먹을 것이 없어 진흙에 버터를 약간 가미해 만든 진흙 쿠키로 배고픔을 달래고 있는 어린이들이 나라 곳곳에 넘쳐나고 있는 현실을 보며 몸서리가 쳐졌다. 인구가 천만 명에 가까운 나라의 대통령이 지진 당일 어디에서 잠잘지 숙소조차 정해지지 않았다는 외신이 아이티의 현실과 미래를 투영하는 것 같아 그날 저녁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1804년에 비교적 일찍 독립한 아이티, 풍부한 천연자원과 비옥한 땅으로 한 때는 카리브해의 부국으로 불렸던 나라가 오늘과 같은 참상을 겪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다 정확한 견해는 역사가와 전문가들의 몫이지만 프랑스가 아이티에서 축출되며 미국과 공조해 해상봉쇄를 했고 이에 못 견딘 아이티가 프랑스에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금액인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내기로 합의해 채무국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 아이티 비극의 시발점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나중에 약간 낮춰지기는 했지만 현재 환율로 210억 달러에 이르는 이 채무가 발전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채무 관련 상환액이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부 예산의 80%에 이르기도 했고 1947년에야 다 갚았다니 족쇄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이후 열강의 지원을 받은 장기 독재정권의 출현, 미국에 의한 국내 쌀 농업의 붕괴와 취약한 산업기반,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재해가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재해는 적지만 해방 전만 해도 여러 가지로 아이티와 비슷했던 우리나라가 반도체, 휴대폰, LCD, 조선, 철강, 자동차 등에서 세계시장을 호령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힘든 기적이다.


독일의 탄광이나 병원, 열사의 중동, 베트남의 밀림에서 피와 땀을 아끼지 않은 한국인의 근면함과 자신감이 이러한 신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업계 특성에 맞는 품질관리와 고객의 요구사항을 한 발 먼저 읽고 대응하는 발 빠른 전략만이 치열한 세계시장에서의 리더를 지키는 일이다. 품질보다 양적 성장과 원가절감을 우선시해온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 도요타 자동차의 대량 리콜 사태를 지켜보며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냉엄한 경쟁의 세계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거대한 골리앗 같아 넘볼 수 조차 없다고 느끼던 미국이나 독일의 세계적 대기업을 누르고 삼성전자가 업계 1위로 등극한 역사적 쾌거 한편에 아이티의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함도 느껴진다. 세계 전장에서 국위를 떨치는 우리 기업들의 선전과 아이티의 조속한 재건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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