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Apr 04. 2024

왜 <밥사>가 가장 높은 학위일까?

현실적인 이유

  오래전 일이다. 회사 근처 어느 식당에서 직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데 다른 부서의 차장님이 우리 일행의 식사비를 계산했다는 것이었다. 그와 업무적으로 관련이 많다거나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닌데 뜻밖의 호의에 놀란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은 서울 중심가 한 대형극장의 소유주였다. 평소 그의 여유로운 행동이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지금은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일이 드물지만, 그리 멀지 않은 때만 해도 <가족>이라는 말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공동체의 결속을 강조할 때 흔히 <한 솥밭을 먹는 식구>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되었다. 까다로운 해외 고객도 회의 전날 저녁 호텔에서 식사 한 번 하고 나면 업무가 순조로운 경우가 많았다. 미국도 중요한 법안 통과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나 특별한 의미가 있을 테지만, 우리처럼 절실하지는 않은 듯하다. 오죽하면 우리 인사 중에 <식사하셨어요?>라는 말이 있을까? <밥사>가 석사나 박사보다도 더 높은 학위라는 세상의 농담 속에 다음과 같은 뼈를 때리는 민초의 현실 인식이 숨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밥>을 사는 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단 둘이 식사할 때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몇 명만 모여도 지갑을 선뜻 열거나 휴대폰을 결제 단말기에 갖다 대는 게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왜 <밥사>가 현실의 세계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에서 밥을 살 수 있는 너그러움과 경제적 여유 그리고 식사를 공유하는 행위의 문화적 중요성이다. 음식 공유는 조류에서도 관찰되듯이 관계 형성과 강화의 수단으로 여겨지며, 이는 개인적 유대와 사회적 결속이 은연중 학문적 또는 직업적 성공보다 더욱 가치 있게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운 초등학교 동창이 대기업에서도 보기 어려운 직원 복지를 제공한다든가 모르는 군인들의 식사비를 내곤 한다는 것을 그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영향력은 현실의 세계에선 대부분의 박사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대에는 아직 이렇다 할 경력을 축적하지 못해 출신학교를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school smart 못지않게 중요한 게 street smart 즉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밥을 사는 것은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로 간주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계가 돈독해지고, 인간관계를 깊게 하며, 전문적 네트워크 형성이 아무래도 쉬워진다. 이러한 행동은 공식 교육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개인의 삶과 경력에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화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학문적 성취를 지나치게 중시하는데 대해서 은근히 비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밥을 사는 걸 석사나 박사보다 더 높게 평가함으로써, 실질적 우월성을 재치 있게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유머를 통해 누군가에게 밥을 산다는 것을 학문적 성취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대해 재치 있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상의 즐거움과 인간관계가 큰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이런 관대한 행위를 학문적 성취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사회를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은 학문적 또는 기술적 지식뿐만 아니라 구성원 간의 따뜻함과 동료 시민에 대한 애정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요즘 전공의 파업 사태를 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