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 준천만장자, 천만장자, 준억만장자, 억만장자
몇 년 전 한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10여 년 전에 휴대폰 회사의 주임 연구원으로 카메라 모듈을 개발하느라 필자가 다니던 회사에서 다른 선임 연구원과 살다시피 한 고객이었다. 근황을 물었더니 회사를 떠나 창업해 50여 명의 직원을 둔 중소기업의 대표가 되었다고 했다. 대단하다고 말했더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때 함께 일했던 선임 연구원은 카메라 모듈과 전장사업을 하는데 매출이 1조 원대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Hindsight이긴 하지만, 그때 직장인만 할 것 같지 않아 보이긴 했다. 무엇보다 인성이 바르고 사업가적인 기질이 엿보였다. 뚝심도 있었다. 내게는 없는 것이라 쉽게 눈에 뜨였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얼굴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업무상 적어도 5천 명의 고객을 만났는데, 얼굴까지 기억하는 건 5% 정도 될 것 같은데, 이들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최근에 호기심으로 이 고객의 자산이 얼마나 될까 찾아보았더니, 천만장자를 가뿐히 넘어 준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백만장자는 순자산이 14억 원이 넘는 사람을 말하는데, 요즘 서울 아파트 한 채 평균 매매 가격이 이 정도이니, 서울 외곽에 대형 아파트 한 채에 금융 자산을 약간 가지고 있어도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주요 광역시나 수도권 요지에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들도 달성할 수 있는 정도의 자산이다.
백만장자가 흔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천만장자에 눈길이 간다. 천만장자는 순자산이 140억 원 이상이니 흔하지는 않지만, 가까운 친척 중에 한 둘은 있는 정도다. 하지만,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순자산 30억 원만 해도 이미 상위 1%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순자산 30억 원은 가장이 대기업에 다니면서 맞벌이를 한 50~60대에겐 그리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은 아닌 것 같다. 공식은 거의 똑같다. 2000년대 초반에 잠실에 2억 원대 초반의 20평대 후반 아파트를 산다. 5년 뒤 4억 원 정도의 차익을 남기고 주변에 30평대 아파트를 8~9억 원에 매입한다. 10여 년 거주하거나 보유하고 있으니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고 30억 원대로 가격이 급등한다. 회사 주변의 동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자산 증식 패턴이다.
나는 그래서 이들은 준천만장자라 부른다 순자산 28억 원에서 126억 원까지의 계층이다. 동네에서 사진관을 53년째 운영하고 있는 1인기업 사장님도 이 안에 든다. 목동과 서울 서북부에 각각 중형 빌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만든 말이지만, 준억만장자는 1400억 원에서 1조 4000억 원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산이 2000억 원에서 4000억 원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천만장자와 구별되고 싶을 것이다. 예전에 카메라 모듈 개발에 심취했던 선임 연구원이 현재 이 반열에 올라있다. 오래전 만났던 먼 친척이 철도차량을 제조해 납품하고 있다는데 그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실제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는 자신이 그 정도 자산가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억만장자는 흔한 것 같지만, 전 세계적으로 3천 명 정도니 어떻게 보면 대통령보다 되기 힘든 영역이다. 순 자산이 1조 4천억 원 이상인 사람들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이 억만장자들 중 상위 10% 이내에 드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다. 한 분은 전 직장의 선배로 OB모임에서 함께 골프를 친 적이 있는데, 그냥 자수성가한 정도인 줄 알았다. 만년 해커인 내게 전 직장 선배 골퍼로서 라인을 알려 주던 기억이 난다. 나머지 두 분은 전 직장의 총수들이었다. 이들은 지금도 억만장자지만, 필자가 만났던 시절엔 포브스 기준으로 이건희 회장보다 자산 순위가 위에 있었으니 얼마나 자산이 많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중 한 억만장자(포브스 기준 세계 300위권)와 그랜드 힐튼 호텔 노래방에서 <업무상> 함께 했는데 기분 좋게 취한 그가 필자에게 10번 넘게 악수를 청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대만 출신이지만, 미국 유학을 한 데다 영어가 유창해 30분 이상 대본 없이 연설을 하곤 한다. 또 다른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 유수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다국적 기업을 경영하고 미국에 60년 이상 거주했는데도, <못하는 영어 한 마디 하겠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던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 한 사람은 그리스계로 인텔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3만 달러(현재 수준으로 1억 원 정도)로 창업한 조지 퍼골레스다. 어느 날 고객사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직원이 400여 명 정도의 고객사라 해도 협력업체 일개 대리에게 전화를 하는 일은 없는데 특이한 경우였다. 알고 보니 그게 그의 일하는 방식이었다. 담당 엔지니어를 불러 업무를 처리하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정도 지나 그의 회사를 방문했다가 로비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이미 플래시 메모리 등의 성공에 힘입어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라 있었고 직원도 8000여 명이나 고용하고 있었다. <이젠 당신은 직접 대화하기도 어려운 거물이 되었다>고 하니 청바지 차림의 그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부인하던 생각이 난다.
나와는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를 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순자산 중윗값은 3억 원이 채 안된다. 평균의 함정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현실은 순자산 14억 원만 해도 상위 10%에 해당한다. 부동산 계급도를 대학 서열에 비유한 그래픽도 돌아다니는 것 같다. 서열 좋아하는 한국인의 민낯이다. 인터넷 세계에선 중경외시도 명함을 꺼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고 한다. 현실은 그보다 입학하기 쉬운 곳들도 시내 일반 고교에선 반에서 2등 정도는 해야 가능한 것이 현실인 듯하다. 우리나라와 같이 가뜩이나 과잉정상성(Normality Inflation)이 심한 사회에서 뜬금없이 억만장자 얘기를 꺼내는 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가끔은 만나기도 하는 부자들이 어느 범주에 드는지 궁금하긴 하다.
여담으로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을 가까운 친척에게 소개해 40년 넘게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데 남편은 오래전부터 천만장자다. 필자와 일했던 주임 연구원을 회사 여직원에게 소개했는데 여자에게 <딱지>를 맞아 실망했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이 주임 연구원 역시 현재 천만장자다. (선임 연구원은 당시 기혼이라 소개 못함. 소개를 했다면 젠슨황 부인급은 아니더라도 준 억만장자 부인이 될 뻔함). 사람을 소개한다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라 너무 조를 때만 어쩔 수 없이 하는데 소개한 2명이 모두 천만장자가 되었으니, 결혼 정보업체 사업을 했어야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하나 여담으로 위에서 언급한 억만장자의 젊은 미혼 후계자가 내가 근무하던 부서에서 경영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같이 설악산 쪽으로 부서 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젊은 여직원들에게서 감지되던 미묘한 동요가 기억에 생생하다. 나중엔 고위 임원에 올랐지만, 당시 만년 부장이던 우리 부서장은 그에 대한 호칭을 Mr. Kim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자연스러운데 절묘한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 입장에선 상당한 존칭이고, 한국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르는 말이니 아주 적절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신데렐라는 탄생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금융 대기업 창업주의 손녀와 결혼했다. 신데렐라는 되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도 어려우니 일반인들은 대학시절 숙제를 대신해 주겠다는 성실하고 야심 찬
<저가 우량주>를 공략하는 게 최고의 투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