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만 담겨 있다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그 자체로 큰 무게를 지닌다. 남자가 참담하고 풀 죽은 표정으로 사과하면 여자는 그가 크게 잘못했어도 용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과가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의 오해를 해소하고 상대편의 분노를 무장 해제하는 효과가 있다. 나중에 부연 설명을 하더라도 우회적으로 말하지 말고 반드시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해야 한다. 변죽을 울리면 (beat around the bush라 한다) 오히려 반감을 살 수도 있다.
사과(apology)는 본래 apo (= off, away from) + logos (speech)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16세기 말부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유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어 현대에 이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체념(諦念)이란 본래는 “살펴 생각하여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영향으로‘포기’또는‘단념’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나 식자들이 사전에 본래 의미를 적어 놓았지만, 일본의 잔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포기, 단념이란 말이 있는데 굳이 체념이란 게 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중고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아침 조회 시간에 “에~또”하는 게 우리말인 줄 알았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 어렵다(Hard to say I'm sorry)라는 노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이 말을 하기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타이밍을 놓치면 더욱 그러하다. 표현되지 않은 말은 영원히 창공을 떠돌다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다. 보바리 부인에서 용기가 없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던 레옹은 천신만고 끝에 삼 년 만에 엠마를 오페라 극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작가 신경숙의 ‘내 마음의 풍금’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소심한 사내임에 틀림없었다. 나의 이 터질 것 같은 설렘을 양 선생 앞에 쏟아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뒤에서 팔을 덥석 잡았던 것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슴을 불끈 안아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좀체 그런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이었다."
다른 일에는 제법 용기 있는 남자들도 여자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매우 소심한 일면이 있다. 성격이 까탈스러운 데다 여성 혐오자인 유달(Udall)이 웨이트리스 캐롤에게만은 꼼짝 못 하는 영화 장면이 생각나는데 현실적으로 자주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