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단어 family는 다소 생뚱맞게 ‘집안의 하인’이라는 뜻과 ‘집안에 딸린 사람들은 물론 토지 등 일체의 재산까지 아우르는 것’에서 유래했다. 공동 운명체라는 의미가 더 컸던 것 같다. 실제로 가족은 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한다. 가족은 현재의 조건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그 자신으로서 받아 준다는데 가족이 아닌 사람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남도 진실된 교류를 하다 보면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 가족과 유사한 정도의 친밀함과 이해를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본래 남인데도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가족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용기의 원천이다. 정규직에서 한 번 밀려난 아버지는 다시는 복귀하지 못하고 늘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불과했을 때 장래 며느리의 출신대학교까지 계획표에 들어 있었다. 그 예측의 힘이었을까?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던 시점에 그 여대 비서학과에 다니는 사람과 한동안 만나기도 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약병 속의 알약이 쏟아지듯 쓰러지지 않고”80세가 넘어서도 늘 낙천적이었으며 귀가할 때에는 자주 간식을 사 오셨다. 그때 맛있게 먹었던 붕어빵이나 햄버거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당장 생계가 막막했음에도 어두운 얼굴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예전엔 특히 가장의 표정이 그 집안의 분위기를 좌우했었다.
태평양 상공을 지나다 보면 꼭 난기류에 휘말리는 곳이 있다. 그때 기장이 절망적인 말을 하면 모두가 패닉에 휩싸이게 된다. 가장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힘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용기를 얻으셨던 것 같다. 매번 새로운 일에 착수했지만, 제도권에 들지 못하는 주변인의 삶은 늘 고달팠다. 강남 좌파(inverted snob)란 말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 반대였다. 유복했던 유년시절과 달리 사회, 경제적으로 약자였지만 의식만큼은 상류층이었다. 웃어른을 평가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실제로 고시 낭인처럼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와 달리 인문학적인 지식은 지식층과의 교유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결혼기념일을 절대로 기억 못 하는 무심한 게 남편이지만, 그가 곁에 있음으로써 얻는 용기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떤 미국인 부부의 결혼기념일이 3월 7일이었다. 호주로 여행 중이었던 3월 6일 밤 자정을 오분 앞두고 남편이 “오분만 있으면 우리 결혼기념일이야.”라고 자신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잠시 후 기장의 방송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막 날짜 변경선을 지났습니다. 현재는 3월 8일입니다.”
어느 소설에 ‘아버지는 총도 혐오하고 참전한 적도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그 어떤 사람보다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가족에게만 인정받으면 그 외의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기도 하다. 전 과정을 놓고 본다면 전투보다도 더 치열하고 굴곡이 많은 게 인생이다. 전과에 따라 받는 조명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 포화 속을 뚫고 생존해 목적지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