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퍼니휴의 《기억의 과학》
기억은 어려운 문제다. 기억이라는 현상은 누구에게도 익숙하지만, 또 누구에게도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기억이라는 현상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해 밝혀진 것도 최근이지만, 그게 시원스러운 것은 아니다. 기억에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여러 종류가 서로 다른 메커니즘으로 저장되고 꺼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지만 그 여러 종류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도 모든 연구자가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지도 않으며,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더더욱 아득하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그 불가사의하다고 여겨지는 기억이라는 현상에 조금씩 접근하고 있다. 접근법은 다양하다. 아주 미시적으로 분자의 작용을 탐색하기도 하며, fMRI와 같은 영상 장치를 이용하기도 하며, 심리적 기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접근 방법이 다양한 만큼 아직은 완전히 정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기억이라는 현상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에릭 캔델의 《기억의 비밀》이 기억 연구의 분자적 접근법을 소개하고 있다면, 찰스 퍼니휴의 《기억의 과학》은 우리가 기억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좀 넓은 의미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기억이란 어떤 것인지를 심리학과 신경과학을 접목하여 기억의 본질이란 어떤 것인지를 차근차근 접근하고 있다.
그가 보는 기억이란 “현재 순간에 현재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는 정신적 구성물” (15쪽)이다. 이 표현은 매우 함축적이면서 확장적이라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시각이 된다. 즉, 기억이란 당연히 과거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이 확인되는 것은 바로 현재다. 그래서 기억이 기억으로 의미 있는 것은 현재이며, 따라서 현재의 요구, ‘나’라고 하는 자아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인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는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듯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번 기억된 사항이 언제나 고착화된 형태로 인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다시 구성되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기억이란 믿어야 하지만, 또 믿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기억에 관해 알게 되는 인상적인 점은 3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이성보다 감정이 기억에 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 현상’으로 불리는 것처럼 후각이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기억이란 감정과 연관되어 있을 때 더 강력해진다는 점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두 번째는 기억이 미래에 대한 생각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감정과 기억에 대한 내용과 달리 기억과 미래에 대한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 연구들은 기억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계획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생각해보면,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과거일 수 밖에 없으며,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미래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기억이란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기억에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간에 관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기억이 공간적인 것이란 건 몇 년 전 노벨상이 주어진 연구에서 어느 정도 입증된 것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연구의 의미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전문적인 연구에 대해 좀 더 거시적으로 해석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밖에도 기억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은, 좀 독특하다. 어찌 보면 모든 책들이 ‘기억’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책을 쓰겠는가?), 또한 기억에 관한 책들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도 흔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 찰스 퍼니휴는 특히나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찰스 퍼니휴는 심리학자이지만, 또한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과 가족을 끌여들여 기억에 대해서 쓰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일화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회고록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유려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저자의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와 인터뷰를 하는 내용이다. 단순히 자신 가족 중 한 사람의 과거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과거에 대한 진술을 통해서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모습은 신선하고, 정말 인상 깊다.
과학책이 매혹적일 수 있다면,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http://www.yes24.com/Product/Goods/90198617?scode=032&OzSrank=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