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크리츨로우, 《운명의 과학》
매트 리들리가 쓴 본성과 양육에 관한 논쟁에 관한 책 제목은, 우리말로는 “본성과 양육‘이었지만, 원서의 제목은 ”Nature via Nuture“였다. 본성과 양육 중 어떤 것이 더 우선인지, 어떤 것이 개인의 삶에 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과학적 논쟁을 꼼꼼히 소개하면서, 그 논쟁이 지금은 ’양육을 통한 본성‘ 쪽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내비쳤다. 본성이 존재하지만,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은 양육, 즉 환경을 통해서라는 의미였다.
매트 리들리의 ‘본성(Nature)’은 한나 크리츨로우에겐 ‘운명(fate)’이고, 매트 리들리의 ‘양육(nuture)’는 환경이며, 자유의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나 크리츨로우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바로 그 운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을 짚고 있다. 단지 어떤 것이 더 우선이냐는 것도 중요하지만(가장 큰 관심거리가 그거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운명의 의미, 자유의지의 의미,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며,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것이다.
한나 크리츨로우는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추가 최근 들어 뇌과학에 의해 운명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보고 있다. 뇌과학의 성과가 그걸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신경과학은 운명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운명의 개념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뇌의 중심부에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소개하는 연구 성과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운명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헌팅턴병의 발병과 내일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운명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다른 파급력을 갖는다. 신경과학에서 밝혀내는 운명이라는 것은 해당 유전자가 이상이 있을 때 헌팅턴병의 발병이 100%라는 것, 혹은 어떤 성향의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이를테면 샐러드에 손을 내밀 것인가, 도넛에 손을 내밀 것인가와 같은 것)에 유전적 영향이 50%라는 것, 혹은 후성유전학에 의하면 어떤 습관이 자식과 손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것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또는 기말고사의 성적이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것이다. 신경과학, 뇌과학은 역시 사업의 성공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고(그것은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몇 %의 확률로), 그런 사람은 사업에 더 적합하다(역시 몇 %의 확률로)는 식이다. 뇌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와는 다른 방식이라는 얘기다.
한나 크리츨로우도 당연히 그런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신경과학은 인간이 이미 대강의 윤곽이 잡힌 행동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에는 신경생물학과 환경이 함께 작용하면서 그 윤곽을 더욱 세밀히 덧칠하여 인생의 전체적 그림을 완성시키게 한다.”
우리가 대강의 윤곽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아니다. 우리의 과학은 이 대강의 윤곽을 어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5주된 태아의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그 태아를 어찌할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으며, 유전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동생을 낳아 치료할 수도 있으며, CRISPR/Cas와 같은 기술로 유전병 유전자를 치환시켜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세밀한 덧칠’인 셈이다. 저자도 몇 차례나 지적하고 있듯이 운명이라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면 이기적이기 되거나 인생을 방기한다. 어떻게 해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 정해져 버렸는데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는 식의 태도가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세밀한 덧칠은 중요하다. 세밀한 덧칠이 인생의 전체적 그림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는 사람마다 달리 계산하겠지만(과학자들이라고 그 수치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 그 계산방식에 따라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운명을 알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집에, 하다못해 타로점을 치는 사람 앞에 줄이 존재할 리 없다. 그 운명을 과학이 밝혀내길 바라는 것 역시 과학과 사람들의 소망이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운명을 알아낸다고 해서 우리가 내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정시키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말하는 운명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일의 윤곽을 알려주며, 그 윤곽을 어떻게 수정하고 어떻게 다음을 것인지는 어쨌든 나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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