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윈체스터, 《태평양 이야기》
태평양. 어떤 이미지부터 떠올릴까? 푸른 바다. 넘실대는 파도. 아름다운 산호로 이루어진 섬. 저 깊은 심연의 화려한 빛깔의 열대어. 구리빛 피부의 폴리네시아인. 참치를 잡아 올리는 원양어선. 물론 이런 이미지는 선입견일 뿐이다. 태평양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이고, 지진의 근원이다. 태평양에선 수백 차례의 원자 폭탄, 수소 폭탄 실험이 수행되었고, 인간이 내다버린 플라스틱 조각들이 모여 섬을 이루며 떠다니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처지이고, 미국과 중국의 해군과 공군이 첨예한 대립을 하는 바다다. 고요하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떠들썩함이 쉽게 눈에 띠지도 않는 바다가 바로 태평양이다.
우리가 태평양의 한쪽을 면하고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학교의 교가들 때문이다. 지금도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고등학교 교가에서는 ‘태평양의 노도(怒濤)’를 발밑으로 굽어본다고 했다. 거기에 지금은 황사의 근원지로 알려진 노비사막의 모래를 한 줌의 먼지로 표현했으니, 그만큼 웅대한 기상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태평양이야말로 웅장한 기상을 비유할 만한 존재인 셈이다.
사이먼 윈체스터가 바로 그 태평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했는데, 윈체스터는 1950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그 이후에 태평양을 두고 벌어진 (수백 개의 후보 가운데) 10개의 이야기를 골랐다. 10개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지만(하나하나가 모두 단행본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다), 묘하게도 서로 호응하면서 태평양의 과거와 오늘, 바다와 섬, 대륙,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순과 희망 등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애당초 ‘태평양 이야기’라고 했을 때, 그저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主)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보다는 그 태평양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류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과연 사이먼 윈체스터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우선 사이먼 윈체스터가 1950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삼은 얘기부터 해야 한다. 여러 저자들이 현대의 시작을 달리 잡았다. 이안 부르마는 1945년을 ‘0년’이라고 칭하며 현대의 시작점으로 잡았고,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는 1947년은 현재의 시작이라 했다. 나름의 이야기 있고, 또 그럴 듯 하다. 사이먼 윈체스터가 1950년 1월 1일을 현대의 시작으로 삼은 까닭은 일단은 과학 때문이다. 1956년 동위원소의 비율 측정으로 연대 추론이 가능해지면서(탄소연대측정법) 기준이 되는 시점이 필요했다. 과학자들은 ‘태평양’에서 이루어진 원자폭탄 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한 시점인 1950년 1월 1일을 기준이 되는 날짜로 잡았다. 그해는 또한 호찌민이 베트남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일본이 새로운 나이 계산법을 도입하고,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터미널의 음악이 멎은 날이었다. 이는 신화적,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로 기준연대가 되는 서기(AD)에 비해 당연히 과학적이며, 현대적이다. 물론 관습을 이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사이먼 윈체스터가 태평양의 현대를 이야기하는 데 기준이 되는 날짜로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렇게 해서 태평양의 현대에 관한 이야기로 꼽은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핵실험과 핵실험으로 터전을 잃은 섬 주민들에 관한 이야기(핵실험으로 일그러진 바다)
휴대가능한 트랜지스터라이오를 개발한 소니의 경영진과 과학자 이야기, 그러니까 일본의 도약에 관한 이야기(트랜지스터라디오 혁명)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독특한 문화에서 젊은이들의 문화가 된 서핑에 관한 이야기(서핑, 파도가 주는 선물)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을 중심으로 남북한 분단에 관한 이야기(럭비공 같은 나라, 북한). 여기서 저자는 북한을 ‘골칫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홍콩 앞바다에서 벌어진 퀸엘리자베스호의 화재 사건. 이는 홍콩 반환에 대한 이야기로,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 독립에 대한 이야기다(태평양 식민 시대의 종식)
태풍과 엘리뇨 등에 관한 ‘기후 이변, 태평양에 위기가 닥치다’
지역적으로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스스로 서구임을 주장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모순적인 태도(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생명의 기원을 담고 있는 태평양 바닷 속 이야기(앨빈호, 바닷속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하다)
태평양의 오염을 경고하는 ‘바다가 보내는 경고’
그리고 당연히 ‘미국과 중국의 충돌’. 여기서는 놀랍게도 필리핀 피나투보화산 폭발 이후 무너진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으로 인한 중국의 도발과 미국의 응전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가장 가까운 이야기는 역시 푸에블로호 납치와 관련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아픔이 별로 담겨 있지 않다. 지도 위에 임의적으로 그은 선 때문에 태어난 나라가 북한이라는 인식이다(사실 그것 때문에 태어난 나라가 남한이라고 해도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부주의한 첩보 활동으로 납치된 미국의 낡은 선박과 ‘골칫거리’ 북한이라는 인식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 보이고, DMZ에서 잡지사의 광고주들을 모시고 오찬을 했다는 마지막의 에피소드는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하다. 이게 사이먼 윈체스터라는 한 작가에 대한 실망이라기 보다는 한반도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라는 생각이 우선이다.
눈을 반짝이며 제일 흥미롭게 읽은 글은 앨빈호라는 잠수정이 찾아낸 심해열수공에 관한 이야기다. 태평양의 깊은 바닷속에서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공기가 닿지 않는 그 깊은 바닷속에서 생명체들에 에너지를 주는 것은 황을 기반으로 화학합성을 하는 미생물이다. 또 온갖 광물질을 포함한 물질들이 한데 엉켜 뜨거운 김을 품어내는 심해열수공은 이제 생명의 기원에 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이자,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보고로 꼽히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태평양을 둘러싼 역사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 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야말로 태평양의 본질이지 않나 싶다.
끝으로 사이먼 윈체스터는 항공모험, 오염, 쓰레기 소용돌이, 산호 탈색 현상 등에 관한 태평양의 교훈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건 중언부언이다. 그러나 중언부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잘 안다. 태평양은 정말 넓은 바다이며, 거기서 생명이 태어났으며, 생명이 살아가고, 지구라는 (적어도 인류에게는 유일한) 행성에 에너지를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50139167?art_bl=12714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