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 텔퍼, 《여성 연쇄살인범의 초상》
기대감이 있었다. ‘여성 살인자(murderess, 혹은 원제처럼 lady killer)’라는 자극적이고, 또 조금은 에로틱한(?) 소재를 가지고 쓴 책인 만큼 어떤 강렬한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사회의 모순, 내지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고통 받으며 어쩔 수 없이 연쇄 살인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는 안타까운 사연 같은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에 연민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했다. 또 너무 에로틱해서 주제와 벗어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연민을 느낀 여성 연쇄살인범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녀들은 살인에 무심했고, 주변 인물을 죽이는 데 양심에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정말 사이코패스다웠다. 그들은 마음 먹은 대로 음식물에 비소를 넣었고, 남편이,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어쩌면 음식을 건넬 때 상냥한 미소를 지었을지 모른다. 그게 더 으스스하다.
여성과 연쇄살인을 연결 짓기가 힘든 것은 역시 편견이다. 여성이 힘으로 남성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리 생각할 수 있고,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고정되게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력을 쓰거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이 사용한 비소 같은 것이다. 약한 자들의 살인법이라 할 만 한다. 그처럼 간편한 살인법으로 그녀들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에 이르는 (대체로) 남자들을 죽였다.
소개하는 여성 연쇄살인마의 사회적 신분은 양 극단이다. ‘피의 백작부인’ 바토리 에르제베트나, 러시아 귀족 부인 다리야 니콜라예브나 살티코바, 프랑스의 귀족 부인 마리 마들렌 같은 지체 높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이들 중 앞의 두 인물은 굳이 비소와 같은 약한 자들의 살인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나머지는 어렵게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정말 여성 살인자들의 분포가 그런지는 통계적으로 따져봐야겠지만, 이런 분포는 여성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구조 속에서 잉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그러나 저자는 굳이 사회적 구조의 영향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깊게 파헤치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한 지역의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살인에 가담한 헝가리 나기레브 마을의 여성들에 대한 얘기를 제외하고는 연쇄살인 여성들의 광기와 뻔뻔함, 혹은 그녀들을 다루는 언론의 이중잣대(여성의 외모가 그 여성의 범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가 중심이다. 아쉬운 점이다.
이 책에서 분명하게 결론짓는 건, 여성들이라고 살인을 저지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릇된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모두 사람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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