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의 틀리기 쉬운 영어》
여러 차례 밝혔었는데, 나는 빌 브라이슨의 팬이다. 내 책장에는 (최근의 《바디》까지) 빌 브라이슨의 책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시작이 영어 책이라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도) 의외다. 바로 《발칙한 영어산책》이 내가 접한 첫 빌 브라이슨이었다. ‘영어산책’이란 책 제목을 단 책, 그것도 700쪽에 가까운 벽돌같은 책을 왜 골랐는지 스스로 긍금한데, 어쨌든 그 책을 읽고 나는 빌 브라이슨의 홀딱 빠졌다. (지금은 없어진) 다른 블로그에 이 책을 읽노라 했더니 미국에 계시던 동포분이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고 덧글을 붙여주었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그때부터 빌 브라이슨은 나의 ‘최애’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빌 브라이슨의 틀리기 쉬운 영어》를 읽게 된 이유는 오로지 빌 브라이슨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깊게 보지도 않았다. 《발칙한 영어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영어 수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웬걸, 이건 영어 사전이다(A부터 시작해서 Z로 끝나는). 영문 첫판이 1984년에 나왔다(이 얘기는 1994년에 영문판이 나온 《발칙한 영어산책》보다, 1990년에 나온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영어 수다》보다도 더 이르단 얘기다. 어쩌면 첫 책일까?). 이른바 초창기(그리고 지금도) ‘여행 작가’로 소개되는 빌 브라이슨이 <THE TIMES> 교열기자 출신이라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영어 사전을 다른 책 읽듯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빌 브라이슨이니 읽게 된다.
당연히 오래 걸렸다. 오래 걸렸지만, 사실 오래 걸린 셈이 아니다. 사전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니,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오래 걸렸더라도 오래 걸린 셈이 아니고, 끝까지 읽었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다. 역시 빌 브라이슨이니 가능한 일이다.
영어 쓰기에서 다양한 측면(주로 오류)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교열기자로서 접했던 문장과 단어의 오류들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문법 같은 것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읽어도 그냥 머리 속을 관통해서 지나갔고, 잘못된 철자에 대한 얘기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단어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것들은 대체로 재미있고, 또 어떤 경우엔 짙게 밑줄을 그었다. 이를테면 맨 첫 장부터 나오는 ‘abbreviations, contractions, acronyms’ 같은 것이나, 거의 끝에 나오는 ‘wound, scar’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책이 아니었다면, empathy와 sympathy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것이고(“empathy는 대개 심각한 불행에만 적용되고, sympathy는 어떤 작은 어려움이나 차질에도 쓰일 수 있다.”), 모두 ‘전염성의’라는 뜻을 지닌 contagious와 infectious가 아무 때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란 걸 알 수 없었을 것이다(“접촉으로 확산되는 질병에는 contagious를 쓴다. 공기도 물로 확산되는 질병에는 infectious를 쓴다.” 그러니까 COVID-19는 infectious하다.). 그 밖에도 많은 흥미롭고, 중요한 단어들의 미묘한 어감과 쓰임새의 차이에 대해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런데 책 전체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바로 중복되어 사용되거나 쓸데없이 길어진 문구들에 대한 지적이다. 생각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일 수 밖에 없는데 재귀대명사를 굳이 쓴다든가, 미래에 하는 일임에 분명한 것인데도 미래라는 뜻을 덧붙인다든가 하는 것들이다(이를테면 ‘future plan’ 같은 것이다. future는 군더더기라고 지적한다). 이 밖에도 수많은 불필요한 단어들이 영어에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빌 브라이슨이 이를 (혐오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불편해하고, 또 문장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어만이 아니라 우리 문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사전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데서도 나오는 빌 브라이슨의 유머 감각이다. 절대 글을 딱딱하게 쓸 수 없는 빌 브라이슨의 글쓰기는, ‘major와 마찬가지로 남용된 나머지 지긋지긋하다.’처럼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하고, ‘plan ahead’와 같은 문구를 해설할 때는 “앞일을 계획하지 지난 일을 계획하나?”처럼 약간의 독설도 포함한다. 완고한 전문가가 어떤 용례를 쓰면 안 된다고 한 책에서 그런 용례를 쓴 예를 (가끔) 소개할 때의 빌 브라이슨의 표정을 떠올리면 즐겁기도 하다.
그래도 어쨌든 이 책은 사전이다. (내 기준으론) 상당히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소설책처럼, 에세이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한번 읽어서 대체적인 내용을 파악했다고 책을 읽었다고 다시 읽지 않아도 읽었다고 떠벌일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몇 가지 내용은 기억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필요할 때 찾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사전’이다. 그런데 꽤 재밌는 사전이다. 그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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