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바그너, 『진화와 창의성』
생명체가 진화를 통해서 창의성을 발휘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말 같다. 하지만, 진화의 메커니즘을 자연선택이라고 했을 때는 그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그다지 녹록한 일이 아니다. 자연선택이라는 것은 생명체에 변이가 생기고, 그 변이 사이의 경쟁에 의해서 생존 혹은 번식에 조금이라도 나은 개체가 살아남아, 혹은 더 많은 자손을 만들어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여기서 살아남는다거나 더 많은 자손을 만드는 것은 먼 미래의 소용을 예견하고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당장 지금의 상황에 맞추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먼 미래에 굉장히 적응적인 형질이라고 하더라도 잠시 동안의 부적합성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원인이 되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형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기기 힘든 것이고(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창의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당연해 보이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일을 진화생물학자 안드레아스 바그너는 해내고 있다. 그가 그 연결고리로 삼은 것은 ‘지형도 사고’다. 2차원에서 시작해서 3차원, 수십 차원으로 확장되는 지형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한 방법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가 바로 창의성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자연선택은 현재 상태에서 무조건 한 방향, 즉 오르막만을 올라가려 한다. 그런데 그러다 그것이 잘못된 길이었을 때는 돌이킬 수 없다(“자연선택은 상황이 더 나아지기 전에 악화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건너가야 할 필요가 있는 협곡을 아예 봉쇄해버린다”). 그러면 다른 방도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1920, 1930년대 진화학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킨 3인방 중 한 명인 시월 라이트가 제일 먼저 제안한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이 있다. 유전적 부동은 유전자의 무작위 추출로 다음 세대와 먼 세대의 형질이 결정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지역으로 옮아간 집단이 다른 데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정한 형질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원래 옮아갈 때의 집단에 우연히도 그 형질을 가진 개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유전적 부동은 예측치 못한 형질이 한 집단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집단의 크기가 작을수록 현저하게 나타난다.
안드레아스 바그너는 바로 지형도 사고, 유전적 부동을 통해서 생명체가 창의적 특성을 가지게 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이 설명은 다소 전문적일 수도 있지만, 일반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게 유전적 부동을 통해서 여러 봉우리 사이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진화가 일어나고 창의적 특성이 일어난다고 설명한 후, 그는 진화학을 넘어선 보다 보편적인 설명으로 이어간다. 그것은 사회에서의 창의성의 문제이다. ‘영업 외판원 문제’, 즉 외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도시를 방문하는 문제를 푸는 데 있어 기계, 즉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방식을 이용하면서 다시 유전적 부동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다행히도 유전적 부동은 생물학적 진화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유전적 알고리즘을 도와 이 함정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 대부분의 유전적 알고리즘은 열에서 몇천 개 범위 안의 개별 개체들이 있는 개체군이라면 어떤 개체군이든 진화시킨다.”
그러면서 인간의 창의성 문제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 있다. 여기서 익숙하거나 혹은 흥미로운 예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미 다른 데서 접한 바 있는 피카소와 모차르트의 예도 있다. 피카소와 모차르트가 창의적 천재이며, 굉장히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은 누구라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정말 많이 시도했다는 점이다. 모든 작품이 최상의 창의적 작품은 아니며, 그 숱한 시도 속에서(즉, 유전적 부동의 시도) 창의성이 발휘되었다는 시각이다. 이는 이 둘뿐 아니라, 작가는 물론 과학자에게도 해당된다.
또한 창의성에는 다양한 경험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 부분 역시 많은 과학자와 예술가를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여러 국가, 다양한 직업, 내지는 어쩌면 무용해 보이는 시도들을 통한 많은 경험이 결국은 창의적 과학자, 예술가를 만들어냈다. 물론 모든 헤매이는 이가 창의적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선천적 특징이 필요하지만 어느 수준까지는 창의성은 기를 수 있는 것이란 점은 안드레아스 바그너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장, ‘9장 한 명의 아이에서 문명에 이르기까지’는 우리나라 얘기로 시작한다. 바로 수학능력시험 날의 ‘괴기스런’ 풍경(!)을 그리고 있다. 모든 일상생활이 수능이 끝나고(사실은 그 전날) 학생들이 교과서를 집어던지는 퍼포먼스, 수능 시작 시간에 맞춰 잠시 중단되고, 사찰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 대중교통을 증편하고, 항공기 이착률이 금지되고, 경찰용 차량이 동원되고, 시위대들의 시위도 연기되는 등 바그너는 “한국의 수능이라는 시험이 대중의 상상력까지 지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후의 논의는 서양에 더 많이 알려진 중국과 일본의 교육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인상은 우리나라의 수능과 교육에 더 깊게 박혀 있다. 바그너의 시각은 확고하다. 이런 교육은 창의성 진작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창의성에 도움이 되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것에 모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수능 체계가, 교육이 인재를 기르는 데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문제의식을 공유할 만하다.
정말 많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밑줄을 많이 긋게 되는 책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도 보긴 했지만, 그런 부정적 의미(그럴 듯한 말들의 연속)에서 긋는 밑줄이 아니다. 공감의 밑줄이고, 배움의 밑줄이다. 그중 딱 하나만 인용해본다. 좀, 아니 상당히 착잡한 마음에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과학의 부흥을 이끈 주인공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네바 부시의 꿈이다.
“부시는 정부가 기초 연구를 위한 자금을 지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연구는 항생제의 발견과 같은 즉각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부시는 ‘주도권 쟁탈 같은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말로 준비된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정부의 모습을 꿈꾸었다.” (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