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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일 작가입니다", 박경리

박경리, 《일본산고(日本散考)》

by ENA

난, 우리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박경리가 받았으면 했다. 이미 2008년에 돌아가셨으니 물 건너 가버렸지만. 어쩌면 후보쯤은 올라갔지 않았을까 싶지만 확인할 도리는 없다(공식적으로 노벨상 후보 명단은 현재 1971년까지만 공개되고 있다). 검색해보면 오히려 사위 김지하 시인이 후보였다는 보도만 있을 뿐이다. 그도, 그의 아내이자, 박경리의 딸 김영주 씨도 모두 이 세상엔 없다.


박경리의 산문을 묶었다. 유고 산문집이다. 그런데 단지 수려한 글들을 골라 묶은 것은 아니다. 뚜렷한 주제가 있다. ‘반(反)일본’.


제목이 ‘일본산고(日本散考)’다. ‘산고(散考)’란 한자말은 적어도 네이버에선 검색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낱자로 해석해볼 도리밖에 없는데, ‘산(散)’은 ‘흩다’, ‘흩어지다’ 같은 뜻을 갖는다. ‘고(考)’는 ‘곰곰이 생각하다, 헤아리다’란 뜻이다. 어찌보면 산(散)과 고(考)는 상반되는 글자 같다. 그런데도 ‘산고(散考)’란 말이 무슨 말인 줄 짐작할 수는 있다. ‘흩어져 있는 생각’이란 뜻일 테고, 여기저기 흩어진 글들을 모았다는 의미로도, 깊은 생각들을 쓴 글이지만 통일된 기획 아래에 쓰진 않았다는 뜻일 게다(나의 추측일 따름이지만). 모두 일본에 관한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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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미 꽤 오래된 글들이다. 지금과 제일 가까운 글도 2000년의 글이고(<다시 Q씨에게 ? 망상의 끝>,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 다나카 아키라의 글에 대한 반론인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는 1990년에 《신동아》에 게재한 글이다. 대체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글이니 시의성이 중요할 텐데, 그런 면에서 이 글들을 이미 의미를 잃은 글이라야 한다. 그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좋은 글을 썼었구나, 하는 감상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나는 반일 작가입니다”라는 선언이 그때 의미 있었듯이 지금도 의미가 있고,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는 일갈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그때, 그러니까 1990년에 이미 식민지의 시절이 오래되었으니 다른 관계를 맺고, 투정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일본 지식인의 글에 박경리가 분기탱천하여 글을 썼듯, 지금도 그 관계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박경리는 자신은 분명히 ‘반일 작가’이지만, ‘반일본인’은 아니라고 했다. 일본 자체의 반문명적 행태와 기괴한 문화와 역사의식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대했다는 얘기다. ‘반일 작가’라느니,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라고 하는 등의 얘기는 그것만 떼어 놓고보면 대단히 감정적인 언사 같아 보이지만, 작가는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들의 역사, 인물들을 매우 객관화하여 보고 있다. 그런 인식은 ‘우리가 최고’라는 막연한 자부심에 대한 비판, 즉 우리에 대한 비판을 보면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일본에 대한 비판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소설 말고 박경리의 산문은 처음 읽었다. 이렇게 논리적일 수가 없다. 소설가이니 감정에 치우칠 만도 한데, 감정을 올리다가도 금세 냉철해진다. 글에서도 태도에서도 배워야 할 점이다.


한일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오가는 것만 늘었다고 과연 관계가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박경리의 일본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는 후련했지만, 금세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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