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 기행》
그의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처음 읽었을 때의 처연함과 강렬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거의 자신의 형제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글 뒤에 가려진 그의 가족사와 우리의 민족사와, 또 인류사 때문에 그랬다. 대학생 시절에 읽고,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읽고도 그 느낌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했다. 후로 그의 책을 가끔씩, 꾸준히 읽었지만 과연 그 책들을 읽었는지 명료하게 기억하지 못할 만큼 《나의 서양 미술 순례》는 너무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가 죽었다. 작년(2023년) 12월 18일이다. 이 책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의 맺음말의 끝에 기록한 날짜가 12월 17일이나 바로 다음 날이다. 그렇게 이 책은 서경식의 유고가 되었다.
미국과 인문이라...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 거의 모든 학문이 미국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충분히 가늠이 되지만, 그래도 미국과 인문은 서로 연결하는 것이 머뭇거려진다. 그의 전작에서 영국과 이탈리아가 인문과 잘 어울리는 것과는 사뭇 반대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미국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떻게 현대의 질서를, 현대의 모순을 바라보는 데 미국을 빠뜨릴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든 미국은 이야기해야 한다. 어쩌면 맨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저를 파헤치면서 아시아로, 유럽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별로 내키지도, 쉽지도 않기에 미루었으리라. 그래서 미국은 그의 마지막 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독자 입장에선 다행이지만, 어조를 보면 무척 어둡다. 가족과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미국의 어지러움이 쓸쓸하다. 그것과 연관된 세계 각국의 상황이 아프고, 암울하다. 꿋꿋이 여러 작가의 미술 작품을, 소프라노의 오페라를,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과 투쟁(그의 저작은 일종의 투쟁이었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그가 거쳐간 사람들 이야기를 한다. ‘인문’은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다 읽고 조금 먹먹한 상태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렇게 책 이야기를 하면서도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벤 샨의 <형제>다. 벤 샨이란 작가를 처음 알았다. 서경식은 벤 샨을 ‘선한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화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모마(MoMA)에서 보고는 옛 동무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적고 있다. 소련이나 동구, 중국의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따뜻한 작가라고도 하고 있다. 여러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구나, 하고 넘기다 <형제>란 그림을 보고는 먹먹해졌다. 떠오르는 게 없을 수 없다. 조국이라고 찾아온 나라에서 체포되어 한 형제는 사형을 구형받고(무기징역 선고), 또 다른 형제는 7년형을 선고받고도 풀려나지 못하고 ‘사회안전법’에 의해 계속 수형 생활을 해야 했다. 서경식이 미국을 처음 찾았던 것은 도움이 될 지도, 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형제들의 구명 운동을 위해서였다. 미국의 세계 질서 속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던 국가에 잡혀 있는 형제를 구하려 그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기라도 가야 했으니.
하지만 서경식은 여기선 자신의 형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정치범들의 석방 이야기를 하고, 감격의 포옹을 언급하지만 여기서만큼은 자신의 형제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 이야기를 한다. 혼자 불러봤다. 치밀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환멸의 그림자’를 언급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경식은 끝내 경계인으로 살다 갔다. 어디서고 주류가 되지 못했다. 하기야 주류는 어느 곳에서건 한 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주류로 살다 간다. 그것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깨달으려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서경식 선생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