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바깥 일기》
이 소설은 <서문>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출간한 지 3년 후 뒤늦게 붙인 서문이다. 이런 글이 어째서 의미 있는 것인지를 설명할 필요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다시 보지 못할 장면, 말,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몸짓, 벽에 그리자마자 곧 지워질 그라피티 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 동요 혹은 반발을 촉발하던 그 모든 것을.”
그리고 그것은, “르포나 도시 사회학적 조사가 아니라, 집단의 일상을 포착한 수많은 스냅 사진을 통한 시대의 현실에 가닿으려는 시도”라 하고 있다.
명백히 형식은 일기다. 아니, 실제로도 일기다. 1985년부터 1992년 사이에 쓴 일기다(이후 1999년까지의 일기는 《바깥 삶》이란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일기라는 양식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그런 형식의 일기가 아니다. 제목 그대로 나의 ‘바깥’에서 쓴 일기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보면,
“이제, 내면 일기―2세기 전에 탄생한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반드시 영원하진 않다―를 쓰면서 자아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확신이 선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바깥을 응시하고 기록할 뿐이다. 파리에서 40km 떨어진 신도시에서 주로 파리를 오가는 기차와 대합실이 그 장소다. 혹은 슈퍼마켓, 혹은 길. 반복되거나, 혹은 단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상의 광경들을 적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감상을 극도로 자제한다. 아니, 자제하고자 했다. 때로 드러나는 감정과 해석은 어쩌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런 것이다. “작가 역시 그것을, 사람들이 자신이 부러워함을 안다. 사람들의 뇌리 저 안쪽에서 진실은 작동한다.” 작가이니 작가에 관해서는 냉정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낸 감정과 상황에 대한 해석은 정말 최소한이다.
심지어 그녀가 왜 그 장소에 있는지에 대한 단서도 거의 없다. 그저 오갈 뿐이고, 거기에서 그 상황을 맞닥뜨릴 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기로서는 자격이 없는 글이지만, ‘바깥’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이 글들은 일기가 되고, 또 소설이 된다.
이 글을 통해 아니 에르노를 알 수 있을까? 난 잘 모르겠지만, 옮긴이는 너무나도 잘 알겠나 보다. 내겐 《단순한 열정》의 아니 에르노와는 전혀 다른 에르노다. 물론 최대한 압축시켜 낸 문장만큼은 분명 아니 에르노다. 다만 나는 이게 지배계급의 언어인지, 피지배게급의 언어인지를 구문이 가질 않는다. 우리말과 글이 아닌 이상 그걸 구분하는 게 쉽지도 않은 일이다. 옮긴이가 그렇다니 그렇게 여긴다.
그녀가 바깥의 일기라는 형식으로 옮긴 타인들의 삶은 불투명하다. 나는 그게 의미 있어 보인다. 우리가 남을 어떻게 투명하게 알 수 있으랴.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