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열하일기』에 감춰진 비밀

구범진,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by ENA

1780년 정조는 영조의 사위 박명원을 정사로 하는 동지사를 청나라로 보냈다. 매년 보내는 사신이었지만 그해는 청의 건륭제의 고희를 맞이하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이 행사를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사신 일행에 박명원의 8촌 동생 연암 박지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기행을 바탕으로 연암은 『열하일기』를 썼다.


조선의 사신 일행은 베이징으로 갔지만, 황제는 열하에 있었다. 평소에 하던 일을 마친 사신 일행은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황제로부터 급히 열하로 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열하일기』라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지만, 아마도 박명원을 비롯한 사신 일행은 당황했을 것이다.


열하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등 일을 마친 사신 일행은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열하에서 박명원 등은 황제만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황제를 직접 알현하는 것 자체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더 이례적이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은 티베트의 판첸 라마를 만났다는 점이다. 달라이 라마에 이은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판첸 라마가 열하에 와 있었던 것이다.


박명원은 황제와 불꽃놀이를 함께 구경하는 등 당시로서는 굉장한 대접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정조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박명원은 성균관 유생 등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판첸 라마로부터 받은 불상이 문제였다. 유학의 나라 조선의 관리가 판첸 라마에 머리를 조아리고 불상을 받아가지고 돌아온 것은 용서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박명원은 ‘봉불지사’라는 치욕스런 별명을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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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조금 어긋난 것을 보고 자료를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쓴 이유 중 하나(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는 자신의 8촌 형 박명원의 누명을 벗기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혹은 정밀하게 글을 구성해서 박명원이 판첸 라마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았으며, 불상도 어쩔 수 없이 받아올 수밖에 없었음을 설득하고 있다. 구범진 교수는 박지원은 박명원의 누명을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우리가 『열하일기』를 읽을 때 이런 면을 지나치면서 읽지만 이런 게 눈에 띠고 분석해내고 파헤칠 수 있는 게 바로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구범진 교수는 이 1780년이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고 본다. 조선의 사신이 처음으로 환대를 받은 이후, 건륭제는 폐쇄적이던 연회를 조선은 물론 외번들에게도 개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이 이 1780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의 사신을 열하에서 맞이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 심증일 뿐이지만, 학술적인 면에서도 파헤쳐볼 근거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인상깊게 보이는 것은, 영조 시대만 하더라도 청이 망하는 것만 기다리는 입장에서 정조 시대에 들면서는 달라졌다는 점이다. 여전히 소중화라는 입장은 변하지 않았지만 원한과 복수의 칼날을 많이 거둬들이고 있고, 현실을 인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동안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도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고, 또 그게 정조 연간에 있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부차적인 내용이지만 인상 깊은 건 또 하나 있다. 바로 천연두다. 청의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의 인조를 포위하고 느긋하게 말려 죽이려던 계획을 바꿔 빨리 강화하려 한 게 바로 천연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청의 황제가 제후국의 왕족들을 베이징이 아니라 열하로 부른 것도 바로 천연두 때문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천연두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도 어떤 역할을 한 것도 흥미로운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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