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푸크너,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마틴 푸크너가 열 다섯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문화가 순수할 때보다 혼합되었을 때, 혼자 갇혀 있기보다 문화적 형태를 차용할 때 번성한다.”
이 뻔해 보이는 진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마틴 푸크너는 세계사의 귀퉁이에서 어쩌면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모두 같은 주제를 향하지만, 조금씩은 다른 이야기들.
기원전 3만 5000년경 만들어진 쇼베동굴에서 시작하여 K-팝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 여정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 이집트에서도 거의 지워진 역사에 해당하는 아케타톤 왕과 네페르티티 왕비 이야기
- 플라톤이 그리스와 그리스 예술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연극에 지금까지 전해진 이야기
- 인도 아소카 왕이 석주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긴 이야기
-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된 폼페이에 남은 남아시아 여신 조각 이야기
- 불교의 가르침을 찾아 국경을 넘고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온 현장의 이야기
- 일본에서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으로 건너가 불교를 기록한 옌닌과 『베겟머리 서책』을 써서 일본 문화의 자존심을 세운 세이 쇼나곤 이야기
- ‘지혜의 창고’를 세운 바그다드
- 계약의 궤를 탈취해온 에티오피아의 시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
- 르네상스의 이야기(흥미롭게도 저자는 르네상스가 세 차례 있었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르네상스에 세 번째 것)
- 아즈텍 멸망의 순간
- 시로 동서양 문화의 만남을 기록한 포르투갈 선원 카몽이스 이야기
- 최초의 흑인 노예 국가를 건설한 생도맹그의 혁명가들이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이야기
- 과학을 소설의 소재로 만든 조지 엘리엇 혹은 메리 앤 에번스의 이야기
- 판화를 통해 새로운 일본 문화를 만든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 이야기
- 그리고 연극을 통해 유럽의 것과 나이지리아의 것을 통합하고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추구한 소잉카에 관한 이야기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이 모든 이야기가 명확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저자가 인정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것만큼은 허깨비 같은 것이고, 혹은 위험한 것이란 점이다. 문화적으로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을 보존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 파괴 행위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저자의 이 지난한 세계사 탐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이 놀랍고 특별한 이유는, 사실 이런 메시지 때문이 아니다. 문화의 교류와 혼합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어쩌면 지당한 말씀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러한 예를 통해 듣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야기들의 새로움과 흥미진진함이야말로 저자의 주장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하면서 깊게 빠져들게 만든다. 그게 이 책의 진짜 특별함이다. 익숙하지만 새로 배우는 느낌이다.
* 마틴 푸크너라는 이름이 익숙했는데, 찾아 봤더니 『글이 만든 세계』에서 만났었다. 그때도 정말 좋았다. 아직 다른 책은 번역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 동아시아에 관한 얘기나 나올 때 본문에서는 거의 중국과 일본으로, 우리나라를 건너뛰는 느낌이 들어 다소 아쉬움을 가졌었다. 그런데, <에필로그>에 와서는 현대의 문화 혼합의 전형적이고,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K-팝을 들고 있다. 우리는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K-팝은 거의 세계사적 사건일 수도 있단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