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지, 『사유하는 미술관』
그림을 통해서 역사를 읽어낸다.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화가는 그가 살아간 시대와 사회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감수성이 예민한 훌륭한 화가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회의 미묘한 모습을 그림에 반영하고, 그것을 미래 세대인 우리에게 남겼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읽고, 그 시대의 의식을 읽고, 그 시대의 감수성을 느낀다.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섯 장이 왕실의 인물들, 성과 사랑의 이야기, 음식에 관한 그림들, 중세의 풍경, 권력에 관한 이야기, 근대 사회의 모습을 각각 담고 있다. 이렇게 구분하고 있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거나, 혹은 그 시대에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나는 여기의 그림들을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가가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그림과, 화가가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를 표현하는 그림이다. 첫 번째를 통해서는 우리는 화가가 살아간 사회를 그림을 통해 읽을 수 있고, 두 번째의 그림을 통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인식을 그림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
이를테면, 마네나 르누아르 등과 같은 프랑스 화가들이 센강과 같은 야외의 모습을 그린 것은 그 시대의 변화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오노레 도미애의 작품을 통해서는 당대 프랑스 사회의 빈부 격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읽을 수 있고, 클로드 모네가 런던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는 (그는 비록 그런 시각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산업사회에서 벌어진 대기 오염의 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들의 그림은 당시 네덜란드가 어떻게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해서 그린 휘렘 술탄, 즉 록셀라나나, 비잔틴 제국에서 매춘부(정확히는 배우)에서 왕후가 된 테오도라를 그린 그림 등을 통해서는 그림이 역사를 어떻게 왜곡해서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시대에 여성을 보는 시각을 읽어낼 수 있다. 권력에 대한 그림들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자를 옹호하고 선전하기 위한 그림 자체만을 보아서는 그 시대를 그대로 읽어낼 수가 없다. 그 이면에 자리잡은 그림의 의도를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와 같은 그림의 경우는 물론이고 첫 번째의 경우도, 아무런 지식이 없이 그냥 그림 자체만을 봐서는 그림을 통해 역사와 사회를 읽어낼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그린 시기에 왜 그런 그림을 그렸고, 어떤 식으로 변형시켰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또 그 시기의 사회상과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인식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내자가 필요하다. 바로 이 책의 작가 김선지와 같은 역할 말이다.
그림을 그림 자체의 미(美)적 구성만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한 그림도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림은 역사와 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아무리 그런 의식이 없이 그려진 그림에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미술관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 역사에 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이야기, 인물이 적지 않다. 록셀라나도 그렇고, 여자들의 결투가 드물지 않았다는 사실도, 셀카의 개척자랄 수 있는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그녀에 대해선 어디선가 읽기는 했는데, 그것을 셀카와 관련지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와 같은 이들도 그렇다. 직사각형 모양의 가축 그림들의 의미도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