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철,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신현철 교수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번역하면서 주석까지 꼼꼼하게 단 《종의 기원 톺아보기》을 낸 바 있다. 《종의 기원》과 같은 책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2328582880). 그 밖에도 《다윈의 식물들》이란 책도 썼는데, 식물학자로서 다윈을 성실히 추적했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3215562162). 말하자면 신현철 교수는 진화학자는 아닐지라도(물론 생물학자면 진화학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 과학사 전공도 아닐지라도 다윈 전문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낸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은 상당한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다윈에 관한 책임에는 분명한데, 다윈 책에 대한 번역서도 아니고, 다윈에 대한 해설서도 아니다. 다윈의 책을 번역하면서, 그리고 책의 용어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쓰이고 있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생긴 여러 의문과 생각을 깊이 투영하고 있는 책이다. 다윈의 용어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번역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다윈이 의도했던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왜곡이 자본주의 사회의 극심한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다.
먼저 그가 문제시하고 있는 용어는 흔히 ‘경쟁’이라고 번역되는 ‘competition’이다. 이 용어는 일본의 후쿠자와 유이치와 가토 히로유키가 썼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메이지 유신 시대의 두 사람이 이 용어, 즉 경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달리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가토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러니까 후쿠자와의 경쟁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함께 이루고자 한다는 의미, 즉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데 반해, 가토는 우승열패의 시각, 즉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나아갔다. 이 중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가 받아들인 것은 가토의 시각이었고, 이 시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생존경쟁이라고 주로 번역하는 ‘struggle for existence’에 관한 얘기다. 이 표현은 competition보다 더 직접적으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해석되지만 신현철 교수가 살펴본 바로는 다윈은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았다. 특히 struggle은 안간힘을 쓴다는 의미이지, 다른 생물을 없애고자 하는 의지로 해석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용어를 여러 번역어를 두고 고심 끝에 “존재를 위한 몸부림”으로 쓰자고 제안한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도 되짚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 5판까지는 쓰지 않던 이 표현은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가 쓴 말이다. 그가 다윈에게 편지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말 대신에 추천한 이 용어에 대해 다윈은 일단 적절치 않다고 했지만(자연선택이 자연이 능동적으로 생물을 선택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지적되고 있었다), 웬일인지 6판에 자연선택과 같은 의미를 갖는 말로 썼다. 정확한 의미로는 ‘최적자생존’인 이 용어(왜냐하면 the fittest와 같이 최상급 표현을 쓰고 있으니까)는 ‘약육강식’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로, 정말로 다윈의 의도와는 달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즉, 생존하는 것이 가장 환경에 가장 뛰어나고 힘이 센 것을 의미하는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장 적응을 잘한 것만 살아남기 때문에 다양성은 사라지고 만다. 다윈은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얘기했음에도.
Evolution을 ‘진화(進化)’로 번역한 데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evolve 혹은 evolution이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윈도 처음에는 쓰지 않고, ‘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고 굳이 풀어서 썼다. 그러다 이 용어가 정착되었는데, 그것을 일본에서 진화로 번역했고(1878년 5원 이노우에 테츠지로), 그것을 우리가 쓰고 있다(중국에서는 연화(演化)라고 하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 진화라는 표현을 곡해하는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를 ‘진보’와 관련짓는 것이다. 특히 진화의 개념을 사회과학 등에서 가져다 쓰면서 ‘진화=진보’와 같이 관련짓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명백히 스펜서식의 진화 개념이다(일본은 다윈의 진화보다 스펜서의 진화 개념을 더 먼저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현철 교수는 이 진화라는 용어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친변(親變)’이다(사실 나는 이 제안만큼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진화라는 용어를 오해하는 것은 그 용어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물학계에서만큼은 그런 오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정착되어 있는 용어를 낯선 용어로 바꾸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 다윈이 쓴 place라든가 station이라는 개념을 생태학적 개념인, 생태학 지위(niche) 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등을 지적하면서 다윈의 원래 의도했던 것들을 되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것은 물론 다윈이 사회에서의 개인의 경쟁이나 국가 간의 경쟁을 옹호하는 사상의 원조처럼 여겨지는 오해를 풀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현대 사회의 극한 경쟁을 안타까워 다윈이 원래 의도를 통해 이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놀라워 한 것은 이 생물학 전공자가 섭렵한 문헌들이다. 신현철 교수의 약력을 가리고 봤다면 아마도 과학사 전공 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관심이 오래되고 깊어지면 이르게 되는 경지랄까?
다윈을 제대로 이해되면 현대 사회, 대한민국의 능력주의, 극한의 경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조금 누그러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우려하고, 그게 어디서 연원한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