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지식, 갈릴레오

마리오 비아졸리, 《궁정인 갈릴레오》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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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학자 마리오 비아졸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갈릴레오와는 ’좀 다른‘ 갈릴레오를 이야기한다.


먼저 우리가 갈릴레오를 보통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보자.


갈릴레오란 이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과학혁명, 망원경, 지구자전설(태양중심설), 피사의 사탑(사실과는 다르다지만), 종교재판(“그래도 지구는 돈다”와 같은, 역시 믿기 힘든 전설과 함께)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갈릴레오를 뉴턴의 법칙으로 이어진 운동의 법칙에 대한 토대를 놓은 과학혁명의 중심인물로, 망원경을 만들어 달을 관찰하고(달이 매끈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봤다),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였으며, 금성의 역행을 설명해 낸 천문학자, 수학자로 평가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였고, 이를 책으로 썼다 종교재판을 받고 간신히 살아나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러한 갈릴레오에 대한 ’탄압‘은 과학과 종교 사이 갈등의 상징이 되어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의 짐이 되었고, 최근에야 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명예와 더 많은 봉급을 위해 로비를 하고, 대학과 자리를 옮겨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자리 이동이 바로 파도바대학의 수학교수에서 메디치가로 옮긴 것이다. 바로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보통은 갈릴레오가 연구를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고, 더 많은 봉급을 주는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그것도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낯간지러운 별칭을 붙이는 아부를 해가며 그런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메디치가는 갈릴레오라는 위대한 과학자를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의 과학을 부흥시키는 데 한몫을 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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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대충 내가 알고 있었던, 그리고 보통 얘기하는 갈릴레오에 관한 얘기다. 그렇다면 ’좀 달리‘ 얘기하는 마리아 비아졸리의 갈릴레오를 알아보자.


비아졸리는 우선 당시의 사회직업적 위상을 얘기한다. 17세기, 갈릴레오의 시대만 하더라도 위계상 수학자는 철학자의 아래였다. 수학자는 기술자와 같은 위상이었다면 철학자는 자연의 궁극적 비밀을 탐구하는 이였다. 그래서 둘 사이의 논쟁은 불가능했다. 갈릴레오는 수학자였으며, 이 사회직업적 간극을 뛰어넘고자 했다. 그 방도는 단 한 가지. 궁정인이 되는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궁정인이 되기 위해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기 전부터 애를 썼다. 망원경을 제작해서 바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기술자의 업적일 뿐이었다. 1609년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하고, 여기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 메디치가(코시모2세)에게 헌정한다. 메디치가는 갈릴레오에게 엄청난 봉급과 함께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한다. 갈릴레오는 드디어 철학자의 반열에 들어섰고, 철학자들과 당당히 논쟁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비아졸리는 당시 궁정의 과학자 및 예술가 후원의 메커니즘을 깊게 분석하고 있다. 군주는 그저 과학 진흥이나 예술에 대한 호의로 그들을 지원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후원자가 되었고, 피후원자들은 군주를 만족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와 같은 피후원자는 자신의 저자 지위까지도 기꺼이 포기하면서 후원자, 즉 군주를 위해서 책을 쓰고, 논쟁을 했다.


이렇게 비아졸리는 갈릴레오의 활동을 절대주의 시대의 유럽에서 벌어졌던 군주와 총신의 관계로 풀어내고 있다. 그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위태로웠지만 갈릴레오는 이를 잘 이용해서 기어코 궁정인이 되어 수학의 지위를 자연철학의 지위로 끌어올리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메디치의 별‘과 같은 것은 단순한 아부가 아니라 당대에 지식을 만들어내고, 이를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도였다고 해명하는 것이다.


이는 갈릴레오의 몰락도 설명해 낸다. 즉, 1632년부터 1633년에 이어진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두고 벌어진, 이른바 갈릴레오 재판은 절친일 뿐만 아니라 갈릴레오를 옹호하기까지 했던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단순히 변심하거나 교조적인 교황청의 추기경 및 사제들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마녀사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르바노 8세가 처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신을 내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즉 갈릴레오가 아무리 해명을 하고, 수정을 하겠다고 하고, 또 1618년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갈릴레오는 내쳐질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궁정의 법칙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갈릴레오가 명성을 얻는 과정도, 추락하는 과정도 17세기 유럽의 궁정의 정치학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비아졸리의 관점이다. 물론 그가 갈릴레오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갈릴레오는 분명 실험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수학으로 현상을 설명하고, 기술적 전통을 중시하면서 역학을 발전시킨 위대한 과학자였고, 과학혁명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궁정의 후원이라는 활동 무대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비아졸리의 얘기다.


갈릴레오 이후, 그러니까 17세기 후반부터는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제도가 생긴 것이다. 영국의 왕립학회를 비롯한 과학 단체가 생기고, 과학의 옳고 그름이 군주와 같은 군주의 평가에 달리거나(실은 최종 평가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사회직업적 지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기관에서 평가하는 관행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과 관련한 지식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과정에서 갈릴레오는 이전 시대를 대표하는, 거의 마지막 인물인 것이다.


마리아 비아졸리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갈릴레오라는 인물과 궁정에서의 역할을 통해 보여주었다. 비록 이것은 17세기의 일이고, 지금은 다른 경로로 과학과 과학자를 평가하는 시스템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권력과 지식의 관계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다.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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