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여정, 지구를 바꾸다

피터 고프리스미스, 《생명의 여정》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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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동물》을 읽고(https://blog.naver.com/kwansooko/224215031548), 계획대로 《생명의 여정》으로 넘어왔다.


《후생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생명의 여정》도 만만찮은 책이다. 만만찮음은 어려운 개념 때문이라기보다는(《후생동물》은 다소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도 있었다고 본다), 논의의 광범위함, 내지는 논의의 속도가 더 많이 좌우했다. 단순히 처음부터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문제를 과학적, 철학적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마치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가 결국에는 바로 그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학과 철학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쉽지는 않다.

쉽지는 않기에 늘 논지를 충실히 따라갔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충우돌식이라 헷갈리지는 않는다. 결국엔 일관된 논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속았다는 느낌, 뭐가 지 모르겠다는 느낌, 그런 것은 들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정성들여 읽은 느낌. 다시 말하면, 충만함 같은 느낌이다(그러고 보니 고프리스미스가 ‘충만함’이라는 단어를 썼다).

문어를 통해 정신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추적한 《아더 마인즈》, 동물 전체로 시야를 확장하여 의식, 즉 감각 경험이 어느 단계에서 시작했는지 묻고, 그게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한 《후생동물》에 이어 《생명의 여정》에서는 우리말 제목처럼 ‘생명의 여정’을 보여주고, 그 장대한 여정을 거친 생명이 그 단계 단계마다 지구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제임스 러브록과 린 마굴리스의 ‘가이아’ 이론을 연상케도 한다. 그러나 고프리스미스도 그걸 의식했는지, 가이아 이론에 대해서 짧지 않게 설명하고, 러브록이나 마굴리스의 견해보다 약화된 ‘약한 가이아’ 이론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이론이라는 것을 한정짓고 있지는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여기의 이야기는 ‘약한 가이아’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는 그러한 지구 환경을 변화시켜온 생명에 대한 일별이 아니다. 생명의 가지는 결국엔 인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책의 결론도 바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지구의 생명체, 동물의 일원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다른 동물(비인간 동물)과 다르다는 것 역시 부인하지 않는다. (비인간 동물 역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언어를 비롯한 문화의 역할로인간은 비인간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지구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조절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런데 그런 인간으로서, 고프리스미스는, 지구에서 인간이 해야만 할 일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순수한 관찰자로서 남을 수는 인간이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이 지구를 온존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고프리스미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잔인한 공장식 축산의 종식, 동물 대상 실험의 대폭 축소(우리의 진보가 조금 느려지는 것을 감수해야할 용기!), 서식지 보존, 재야생화 같은 것들이다. 어쩌면 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이들은 물론, 지구의 기후 위기를 대응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될 만한 얘기들이다.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과학철학자로서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의 발전과 이를 통한 인류 진보의 속도를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대폭 축소하자는 제안은 《후생동물》에서부터 그런 고민의 단초를 보여주었기에 더더욱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비록 쉽게 현실화되지 않겠지만, 아니 현실화되기에 쉽지 않기에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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