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환, 《언던 사이언스》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과학의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냥 우기거나 정치적, 사회적 힘에 의해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것보다 훨씬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는 모양새로도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안을 두고 대립하는 양쪽이 있을 때 모두 과학을 들고 나오는 경우다. 이런 경우, 한쪽은 다른 쪽을 과학을 왜곡한다고, 편의대로 해석한다고, 정치적 힘에 굴복한 것이라고, 혹은 대중을 현혹하고 흥분시키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고 비판, 비난한다. 과연 항상 어느 한쪽이 옳은 것일까?
현재환은 그런 옳고 그름이 명확히 판정되어야 하는 상황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현신》에 빗대어 ‘용의자 X론’이라고 일컫고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미국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광우병 논란에서 한쪽은 친미적인 정부가 진실을 감추고 무리하게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고기를 수입한다고 했고, 다른 쪽은 일부 좌파 세력이 과학적 진실을 왜곡하고 시민들을 선동한다고 했다. 용의자 X론에 의하면 이중 한쪽은 분명하게 ‘악(惡)’의 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현재환의 ‘언던 사이언스’에 기초한 시각에 의하면 둘 다 (사회 정치적 정당성과는 별개로) 과학적 논리에 기초한 것으로 국가나 사회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갈등이다.
이러한 시각은 다양하게 적용된다. 여성성과 관련한 여성 호르몬의 문제도 그렇고, 인종에 관한 문제도 그렇다(우리는 모두 Homo sapiens라는 하나의 종으로 인종적 차이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학적으로 인정하지만, 여전히 ‘과학적으로’ 인종을 카테고리화하여 연구한다). 일제 치하의 일본 학자들이 인종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다르다고도 같다고도 할 수 없었던, 모순적인 상황에 처했던 것도 일종의 언던 사이언스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광우병 사태와 비슷하게, 대만은 RCA암과 삼성 백혈병을 서로 비교하면서 서로 유사한 상황이지만 대만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피해자나 활동가 들이 주장하고, 요구했던 것들이 달랐던 점도 언던 사이언스의 관점에서 보아야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을 진리를 담지하고, 판결할 수 있는 것으로 절대시하는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맞다. 또한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혹은 좀 더 맥락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이용한 논쟁, 논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생학과 연결되어 장애인에 대한 무분별한 차별(차별을 넘어선 억압), 그리고 이어진 나치즘의 망령마저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일이 벌어진 사회적 토대에 대해 연구할 수도 있도, 나아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중립적인 위치에서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이는 다른 사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을 실험실에서(만) 의미 있는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혹은 일시적인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어떤 입장에서 과학을 수행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정치적 의미는 극명하게 갈라진다.
과학에 대한 왜곡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을 단순히 ‘다른’ 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수행되지 않은 과학적 틈이 있으니(그건 맞지만) 서로 반성하고, 이해하자는 것은 상당히 무책임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