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Jan 07. 2021

지구의 위기의 우리의 책임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시간과 물에 대하여》


 

“해양생물학자는 해수 산성화와 바닷새 절멸에 대해 이야기했다. 빙하학자는 빙하 해빙에 대해, 생태학자는 지구 식생 감소와 지하수 수위 하강, 임박한 물 부족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 하지만 어떤 자극도 어떤 흥분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청중은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발표가 끝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러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갔다.” (79쪽)

 

아이슬란드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은 기후 문제에 관한 과학자들의 회의에 관한 경험을 이와 같은 쓰고 있다.

 

지구 온난화, 기후 위기 등에 관한 뉴스가 나오지 않는 날은 없다. 그 뉴스들은 수치를 제시하기도 하고, 어떤 과학자의 말을 전하기도 하고, 북극 빙하가 무너져내리는 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그렇지 않은 이도 있겠지만, 우리는 아주 차분하다. 지구의 위기가 우리에게서 왔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서 문제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우리는 아주 차분하게 그 뉴스를 본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일 수도 있고, 그다지 다급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그렇다고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지구의 위기에 매우 차분하다. - “어쩌면 우리는 개인 자격으로는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슬란드라면 빙하의 나라, 화산의 나라다. 그곳의 시인이 섬세한 필치로 써내려간 ‘시간과 물’에 관한 이야기는 지구의 위기에 관한 고통스런 토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 아이슬란드의 빙하와 화산, 바다 이야기에서 시작된 마그나손의 글은 지구가 지난 100년 간 인간으로 인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숫자가 등장하지만, 그 숫자는 우리의 정서를 심하게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숫자만으로는 자극되지 않는 우리의 감성을 시에서 비롯한 언어로 자극한다.

 

“죽어가는 빙하는 봄만큼 조용하다. 얼음은 열기와 햇볕에 녹아 개울이 되어 졸졸 흐른다. 사실 죽어가는 빙하는 슬프고 연약한 광경이다.” (214쪽)

“쓰레기는 무엇보다 지구에 대한 우리의 무례를, 우리가 순환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 우리는 유독하고 쓸모없고 자연에 해를 끼치는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최초의 종이 되었다.” (255쪽)

 

숫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가 뿜어낸 이산화탄소와 플라스틱과 같은 쓰레기들, 그것으로 인한 지구 대기 온도의 상승과 해양 산성도의 증가에 관한 수치들은 마그나손의 이야기들이 단순한 감정의 토로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우리가 그 수치마저 달리 받아들인다는 사실에는 또한 절망스럽다는 표현을 한다(이를테면 pH가 0.3 감소하는 것은 실제로는 산성도가 2배 증가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이 또한 감정을 흩뜨려 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감수성 짙은 언어로 지구의 위기에 대해서 쓰고 있는 마그나손이 그 해결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의 발명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우리의 편리한 생활을 하루아침에 끝장내자고 하지 않는다. 인도의 가난한 삶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도 경제적 발전의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 심각한 지구의 위기를 해결할 것인가? 이 소설가이자 시인은 바로 ‘과학’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이와 같은 것이다.

“21세기의 가장 큰 도약은 대기 중에서 CO2를 직접 추출하여 가치를 끌어내는 방법을 개발하는 CO2 포집 및 처리가 되어야 한다.” (347쪽)

 

우리가 달에 가기 위해서 쏟아 부었던 돈과 정력을, 혹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과학자들을 동원했던 역사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정치가들, 특히 선진국의 정치가들의 각성이 필요하며, 그것을 용인하는 국민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발전소를 짓고, 공장을 짓고, 소비를 올리겠다는 정치인들만이 당선되는 세상이 아니라, 정부 예산의 2%를 지구 위기를 해결하는 과학과 기술에 쓰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는 정치인이 나와야, 그것도 많은 국가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언이 아니라 실제 투자와 결집이 이루어지는 과학적 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초한 지구의 위기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 이 지구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관한 감수성과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한 과학으로.

작가의 이전글 과거는 함부로 바꾸는 게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