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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an 09. 2021

채워도 채워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 《빛의 현관》

어릴 적 어머니는 집을 지으셨다. 내 기억엔 그렇다. 셋방을 탈출하여 당신의 집을 갖는데, 이미 지어진 집을 사지 않고 직접 집을 짓는 고생을 택하셨다. 길 건너편에 집이 올라가는 것을 매일 지켜보시고 감독하고 지시하셨다. 지금 기준으로는 여전히 불편할 수도 있는 집이었겠지만, 최대한 당신이 살고 생활하기 좋은 집을 지으려 하셨다. 그렇게 완성된 집을 두고 어머니가 어떠셨는지는 모른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다시는 직접 짓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 직장을 옮기면서 그 집을 팔고 나와야 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요코야마 히데오의 《빛의 현관》을 읽으며 수십 년 전의 빛바랜 감상이 떠올랐다.

“아오세 씨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줘요.”

건축가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경우가 흔할까? 어쩌면 그럴 요구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살 집이라면 얼마나 정성들여 지을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그런 요구의 바닥 마음은 그렇게 하면 그래도 ‘내’가 살기에 훌륭한 집이 될 거라는 계산이 있기 마련이지 않을까? TV에 나오는 아파트 광고가 사실 그런 식이다.

 

아내가 원했던 집이 있었다. 결국 짓지를 못하고 헤어졌다. 딸은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아오세에게 삶은 그저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일 뿐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마저 저 바닥에 감추고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그런 삶에 의욕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아오세 씨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워요.”라는 의뢰였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닫는 것만큼 삶에 의욕을 북돋는 것이 있으랴. 하지만 그런 의뢰를 받고 혼신의 노력으로 지은 집에 가족이 입주를 하지 않았다. 그 집에는 오래전 일본으로 망명했던 건축가 타우트의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타우트의 의자를 실마리로 사라진 가족의 행방을 쫓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다(브루노 타우트는 실제 인물이다. 소설의 뒤쪽에 실은 참고문헌을 보면 이 작가가 얼마나 타우트에 대해 연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른 이야기가 있다. 후지미야 하루코라는 화가의 기념관이다. 파리의 뒷골목에서 800 장이 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한 편도 공개를 하지 않고 숨져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하지만 실제 인물은 아니다. 물론 그 비슷한 인물은 있다)의 기념관을 통해 자식에게 자신이 진짜 건축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오카지마의 염원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North light”. 원제가 이렇다. 아오세가 ‘자신이 살고 싶은 집’으로 설계한 Y주택이 바로 북쪽에서 빛이 드는 집이었다. 무조건 남향을 선호하는 우리의 정서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설정을 작가는 ‘의식 아래의 행복’에 대한 은유라고 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계산되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나의 기준에 의존한 행복이라는 얘기인데, 그게 북쪽에서 드는 빛과 어떤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이 바로 그런 얘기라는 것은 알겠다. 소설 속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의 글귀처럼 우리는 ‘채워도 채워도 여전히 부족한’ 것을 채워간다.

 

머무르는 사람은 떠남을 원하고, 머물지 못하는 사람은 정주(定住)를 희구한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리고 상실에 대한 극복에 대한 이야기다. 상실감을 극복한다는 게 말처럼, 이 소설처럼 간단한 얘기만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극복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조금의 희망이 생기는 건 분명하다. 그게 이런 이야기를 읽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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