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Jan 13. 2021

"그런 기린 해부학자는 나 하나뿐이다"

군지 메구,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7, 8년 전에 재미있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 최고의 과학저널이라고 하는 <Nature>지의 자매지인 <Nature Communications>지에 나온, 거북이의 등딱지의 구조를 밝힌 논문이었다(https://blog.naver.com/kwansooko/50176193393). 결론을 얘기하자면 거북이의 등딱지는 가슴뼈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즉 내골격이라는 것인데, 그 논문을 읽으면서 든 내 생각은 좀 복잡미묘했다.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연구가 이런 좋은 저널에도 실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이런 연구도 하는구나 생각도 들었는데, 이런 어쩌면 소용을 찾지 못할 연구를 진지하게 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또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군지 메구의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그와 비슷했다. 이제 서른을 갓 넘은 젊은 과학자가, 요새 핫한 분자생물학이니 뇌과학이니, 아니면 독서계에서 좀 팔리는 진화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기린 해부학에 관한 책을 낸 것부터가 야릇했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야 특이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린 연구를 하고 싶다고 교수의 세미나를 들은 후 들이민 사연도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진짜 기린 연구, 그것도 기린 해부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가 연구하고 밝힌 내용은...


그녀가 기린 해부를 통해 밝힌 새로운 사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의 주요 내용이자 이 책의 주요 내용은 ‘기린에서 1번 가슴뼈(흉추)가 8번째 목뼈(경추)로 기능한다’는 것이다(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포유류의 목뼈는 7개다). 30마리에 이르는 기린을 해부하면서 얻어낸 발견이었다.


기린의 목에 대해서는 나도 관심이 없지 않았었는데, 박사학위를 받기 전 진화학에 대해 강의를 나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 강의를 위해서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 중에 하나가 기린의 목이 그처럼 길어진 데 따른 이득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뭇잎보다 물이 생명에 더 중요한 것인데, 나뭇잎을 먹는 데 따른 적응으로 기린의 목이 그처럼 길어졌다면 물을 먹을 때의 그 불편한 자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진화학 책에서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는데 바로 ‘싸움’이었다. 기린의 긴 목이 수컷 사이의 싸움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이는 군지 메구의 이 책에서도 수컷의 머리가 암컷의 것에 비해 훨씬 무겁고 싸움(넥킹necking이라고 한다)에 쓰인다는 내용으로도 나온다). 오래 전에 강의했던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인데, 그것 때문에라도 군지 메구의 연구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이었다(물론 군지 메구가 발견한 ‘8번째 목뼈’는 그 진화학 책의 가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동성이 높은 ‘8번째 목뼈’는 상하 방향으로 목의 가동 범위를 확대해, 높은 곳의 잎을 먹고 낮은 곳의 물을 마시는 기린 특유의 상반된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만족하게 했다.”


첫 해부에서부터(당연히 헤맸다) 그런 발견을 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핸 얘기가 이 책에서 그녀가 하고 있는 얘기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까 어쩌면 상당히 좁은 범위의 전문적인 내용이기도 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북이의 등딱지에 관한 논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이런 즉각적인 소용을 찾을 수 없는 연구를.


하지만 이 얇은 책에는 저자의 열정과 자부심이 잔뜩 들어 있다. 당연히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최대한 쉬운 말로 쓰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흥분을 주체 못하여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새해 첫날 기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부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모습과 그 심정에서 그녀가 연구를 얼마나 진지하고 즐겁게 대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가 있다.


어쩌면 이런 게 과학하는 사람이 본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기린을 연구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 해부학자는 온 세상을 뒤져 봐도 어디에도 없다. 틀림없이 나 하나뿐이다.”라는 자부심 역시 젊은 과학자의 패기가 느껴져 나도 기분이 좋다.


끝으로 이 얘기는 덧붙여야겠다. 왜 이런 연구를 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나도 박사학위를 정말 즉각적인 소용이 닿지 않는 연구를 통해서 받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의 소용 닿는 연구만 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지 메구 박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기린이나 소나 양과 같은 동물을 표본을 만드는, 그것도 많이 만드는 데 ‘3무(無)’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무목적, 무제한, 무계획’. 그냥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 없다 하더라도 100년, 200년 후에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그때 필요하지 않더라도 상관 없다) 한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일로 여겨지는 연구를, 정말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이런 사람이 과학을 해야 한다. 이 책을 덮으며 더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이런 과학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답답하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미생물학 역사에 그들이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