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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May 28. 2021

실험실은 어떤 곳인가?

홍성욱, 《실험실의 진화》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실험실에 소속된 이후, 실험실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데 ‘실험실’의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실험실은 내 삶에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생활공간 같은 곳이었다. 그냥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니 그곳이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왔으며, 또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인지를 생각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실험실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넓게 과학이라는 분야에 있으면서도 실험실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일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나 홍성욱 교수 같은 과학기술학자 말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소크연구소를, 홍성욱은 서울대학교 김빛내리 교수의 실험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실험실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았다. 브뤼노 라투르는 소크연구소에서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실험실 생활》이라는 책을 통해 실험실을 넘어서 과학의 작동 방식에 대해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실험실 외부의 사람들이 과학을 교과서나 고전적인 논문을 통해서 접하는 데 반해, 라투르는 실험실에서 과학적 사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았다. 사실은 과학자들 스스로는 잘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이다(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런 걸 의식하지 않는다).


홍성욱 교수도 김빛내리 교수 실험실을 연구해서 논문(<실험실과 창의성: 책임자와 실험실 문화의 역할을 중심으로>, 2010년)을 내기도 했는데, 그런 경험과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실험실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를 정리하고 있다. 그런 ‘실험실의 진화’를 통해 실험실이 갖는 다양한 의미, 그리고 나아가 과학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실험실이 과학이 만들어지는 장소이니 실험실에 대한 연구는 당연히 과학에 대한 연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는 실험실의 기원을 연금술사의 부엌에서 찾고 있다. 그러니 초기의 실험실은 화학 분야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모방하여 컨트롤하기 위한 장소가 바로 실험실이었다. 베이컨의 과학철학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실험실은 이후 의학 분야로 확장되었고,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은 실험이라는 과정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실험실을 갖추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실험실이 효용성이 크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과학자의 80% 이상이 실험실을 갖추고, 그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정립되기 시작한 실험실이 이제는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외양부터 멋있는 연구소, 실험실이 있고, 실험실의 의미도 확장되고 있다. 자연을 실험실에서 가져왔던 것이 실험실의 시초라고 한다면, 이제는 필드 자체를 실험실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에 대해서, 과학의 발견에 대해서 읽어봤다. 그런데 그 과학자들, 그들이 밝혀낸 과학이 거의 실험실에서 이뤄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처음으로 실험실의 역사에 대해서 읽어본 것 같다. 그 역사가 그대로 내게로, 내 동료에게로 전해졌다고 생각하니 흥미롭기도 하지만, 전율이 일기도 한다. 과학자는 자신의 터전이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알기 위해서(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혹은 의식하지 않던 것을 의식하기 위해서), 비-과학자는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왔고,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실험실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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