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수학, 수학자와 시인

김민형, 《역사를 품은 수학, 수학을 품은 역사》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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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수학이나, 수학의 역사를 다룬 책은 참 많다. 김민형 교수의 책도 그렇게 봤다. 큰 틀에선 다르지 않다.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에서 시작해서 르네상스의 수학, 과학혁명기와 17세기의 수학 등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넘어가면 확 달라진다. 19세기의 수학을 다루는 장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장은 미국의 수리물리학자 기브스, 아니 그의 전기를 쓴 시인 루카이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고보니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에서부터 좀 달랐다. 그저 그들이 어떤 존재들이고, 그들이 어떤 수학을 만들어냈고, 그 영향이 어디에 이르는지... 그런 얘기가 아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아르키메데스를 찬미한 이유, 카이사르의 숙적이던 공화주의자 키케로가 수학자를 아꼈던 사정은 다른 데서는 접하지 못했던 얘기다. 그러고나서 아르키메데스가 재발명(재발견도 아니고)되었다고 한다. 수학의 흐름에서 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커지면서 플루타르코스가 키케로가 아르키메데스를 찾아내고 찬양했다는 얘기다. 이를 에릭 홉스봄이 엮은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책에서 얘기한 것을 빗대어 ‘전통의 위조’를 이야기한다. 수학도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다음도 그렇다. 바빌로니아 유적에서 나온 수식의 위대함을 이야기하고, 르네상스 시기에 다차방정식의 해를 찾아낸 수학자들을 통해 대수학과 기하학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흔히 생각하듯 수학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확실성을 확보하면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근사적으로 발달한 경우도 있고, 오류를 통해서 발달한 경우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자신이 발명한 미적분학을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멋들어지게 증명하지 않고, 기하학을 통해 애써 증명한 이유를 생각해보고 있다. 다른 책들에서는 미적분학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민형 교수는 여러 다른 이유를 추측하면서 역사적, 문화적 이유를 추가하고 있다. 유럽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던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전통, 즉 그리스 로마 문화를 추구하는 전통을 따르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수학은 (알 콰리즈미에서 알고리즘이라는 말이 나온 걸 보고 알 수 있듯이) 이슬람 문명의 전통 속에 있던 것이다. 반면 기하학은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수학이 그래도 객관적이고 논리적인가?


더욱 인상 깊은 것은 마지막 장이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통계역학의 창시자이자, 미국의 첫 과학자라고도 일컬어지는 조사이어 월러드 기브스에 대한 전기는 시인 뮤리얼 루카이저가 썼다. 루카이저는 자신이 읽기 위해서 전기를 썼다고 했다. 기브스라는 인물에 어떤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시인이?란 물음은 당연한 것이고, 김민형 교수는 이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른 영문학자들과 이를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연구에서 잠정적인 생각을 강의를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은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좌파 시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루카이저에게 기브스의 아버지의 행적이 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더욱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것은 시와 수학이 모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시인도 위대한 과학자를 탐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루카이저의 글은 그런 분석을 지지한다. 이는 어쩌면 수학자 김민형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해가 간다. 19세기의 맥스엘과 볼츠만을 이야기하면서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길게 언급하는 것 말이다. 수학을 오랫동안 다뤄온 수학자가 다다른 곳은, 다다라야 할 곳은 ‘세상’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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