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아쓰코의 글은 어떤 걸 읽어도 정갈하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넘치지 않게 한다. 일본에서, 프랑스로, 이탈리아로, 다시 일본으로 이어진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글에 녹여내는데 그것을 절대시하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세상사에 달관한 모양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치기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경쾌해진다.
《소금 1톤의 독서》는 그녀가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을 모은 책이다. <작가의 말>에서 “책은 ‘직접 읽어보는’ 적극적인 행위를 조용히 기다린다”고 했으니 여기에 평한 책 중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나는 어쩌면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여기의 책들을 이미 읽었다면 누군가의 책을 통해 그 책들을 다시 읽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가 아쓰코의 《소금 1톤의 독서》을 읽으면서는 그런, 내가 여기에 소개한 책을 읽었느니, 읽지 않았느니 하는 문제는 제쳐두었다. 나는 스가 아쓰코를 통해 그녀가 읽은 책들을 소개받는 게 아니라, 그저 스가 아쓰코를 읽고 있었다.
스가 아쓰코는 ‘소금 1톤’에 관해 이탈리아인인 시어머니에게서 들었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까지는, 적어도 소금 1톤의 소금을 함께 핥아 먹어야 한단다.”는 말이었다. 스가 아쓰코는 이 ‘소금 1톤’을 책 읽기에 견주고 있다. 소금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다. 하지만 한꺼번에는 들이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1톤이나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날이 필요할 것인가, 그것도 핥아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거추장스러움을 견뎌야 할까. 어쩌면 결국엔 달성하지 못할 기준인지도 모른다. 책 읽기가 그런 것이다.
몇몇 글을 빼고는 짧게 짧게 책에 대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길어야 겨우 서너 쪽에 불과한 분량에 그 책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내용인지, 자신의 감상은 어떤지 조목조목 잘 풀어놓고 있다. 책을 제대로 읽어야만 이르는 경지라고도 보인다. 책을 자신의 인생에 잘 포개어 놓아야 그런 경지에 이르는가도 싶다.
책 끝에 이 책에 대한 해설을 두 개나 붙여놓고 있고, 옮긴이도 자신의 감상을 붙여놓고 있다. 모두 스가 아쓰코의 글에 ‘모노가타리’란 말을 쓰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이라는 소설에 대한 평 <작품 속의 ‘모노가타리’와 ‘소설’>라는 몇 안 되는 분량이 꽤 되는 글에서 쓰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뭔가 찾아봤다. 일본 헤이안 시대에 유행했던 문학 양식이란다. 가공 인물과 사건을 자유로운 상상에 기초해서 가나로 쓴 산문 문학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근대 이후에 발달한 소설과 다른 게 소설이란 일관된 줄거리를 갖춘 이야기인데 반해, 모노가타리는 그렇지가 못한 걸 일컫는단다. 스가 아쓰코의 글이 과연 그런 범주에 속할까 싶기도 하다. 비록 전체에 걸쳐 일관된 줄거리를 가진 글을 아니지만, 그저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유롭게 써간 글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짧은 글일수록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글에서 많은 가지들을 쳐내면서 정갈하게 만드는 게 더욱 힘들다.
책에서 한 부분만 인용한다.
“‘결말은 어떻게 돼?’ 어릴 적 나는 이렇게 물어보곤 해서 어른들에게 자주 혼이 났다. ‘조용히 들으세요. 과정이 재미있으니까.’” (<독서 일기> 중,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