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이 어떨지 알고 싶은 것은 오랜 소망이다. 누구나 앞날을 알고 싶어한다고 하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난 점(占) 같은 것은 보러 다니지도 않고 믿지도 않지만, 내일이 어떨지, 한 달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10년 후 내 모습은 어떨지 알고 싶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은 끈질긴 유혹이며, 은밀한 욕망이다.
그래서 많은 방법들이 제안되어 왔고, 또 많은 이들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비록 그 방법들은 대체로 부정확한 것이었고, 또 어쩌면 사기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존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만큼 미래는 불안한 것이기에 어떻게든 미래의 모습을 알고 싶고,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왔다.
『예측의 역사』는 전쟁사 연구가 마틴 반 크레벨드가 바로 그 미래를 알고자 애를 써온 인류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예측’이라는 제목을 보고, 난 기후라든가 하는 것을 더 많이 다룰 줄 알았다. 굳이 분류하자면 과학 쪽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절대 알 수 없는 미래의 한 예로 날씨를 잠깐 들기도 하고, 알고리즘에 의한 미래 예측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분명 ‘역사’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실망했나? 그렇진 않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예측의 방법에 대해서 다루면서 내가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구체적인 예를 많이 다루고 있어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눈이 크게 떠지는 부분들이 있고, 그렇게 약간의 지루함을 참고 읽다보니 전체의 맥락이 그려진다.
저자가 미래 예측 방법으로 다루고 있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우선 다루고 있는 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영적으로 미래와 소통하고 있다고 하는 샤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주님, 신탁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 꿈, 죽은 자와 소통하는 영매, 혹은 죽어가는 사람 등이 그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합리적’ 예측이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예측을 하는 이들이 어떤 근거를 가졌다고 생각, 혹은 주장하기 때문이지 현대적 의미, 과학적 의미에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늘을 관찰하여 예측하는 점성술, 징조를 보고 예측하는 것, 새나 내장을 보는 것, 숫자를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써 예측하는 것, 그리고 책, 이를테면 <성경>의 구절을 통해서 예측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지금 봐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아직도 이런 방법이 통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근대 이후에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으로 다루는 것은, 개인이나, 가족, 사회의 길흉화복이 아니라 사회의 운명이나 역사의 흐름 등을 알고자 하는 것들이다. 패턴이나 사이클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여기서 외삽법이 나온다), 헤결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같은 것들이 그것이고, 현대에 들어와서 생겼고, 지금은 지겹게 접하고 있는 여론조사도 그 한 방법이다. 당연히 알고리즘을 통한 모델화나 게임도 해당한다.
이렇게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해 온 듯하다. 미래 예측 방식은 그것을 생각해내고 활용한 사회를 반영하기에 시대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미래를 ‘읽고’ 예측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크게 전환점이 된 시기는 과학 혁명이 일어나고 계몽주의가 대세가 된 17, 18세기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변성의식상태’에 의존해서 미래를 예측했다면, 이 시기 이후에는 그러한 것을 배격하고 어떤 근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다는 것이다(물론 지금도 ‘변성의식상태’에 의존하는 미래 예측 방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방법들을 정리하면서 뜻밖의 얘기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물리학에서야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그 다음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면 심리적, 사회적 요소가 개입하고, 그 요소의 역할이 커질수록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점점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실제 미래에 대한 예측은 오랫동안 비유와 상징에 의존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지금도 통용되는 것은 모호함 때문으로 그것을 어떻게든 일어난 일에 맞춰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상세하게 미래를 예측하게 되면 그것이 틀릴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미래 예측에서)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측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본능, 혹은 본성과 같은 것이다. 비록 내일의 날씨마저 100%의 확률로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런 불확실한 예측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계획도 하지 못할지 모르고, 늘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 예측이 불안을 가중시킬 지도 모르지만, 무엇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을 안다는 것은 정말 큰 차이다. 물론 무엇을 안다는 것이 정말 알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우리가 미래 예측이 정확하든 부정확하든, 미래 예측의 결과 자체가 미래를 변화시켜 왔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알고자 하는 지도 모른다.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실패가 역사를 이루어오고 있으니 우리는 앞으로도 미래를 예측하고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