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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이영석의 서양사 편력기

이영석, 『삶으로서의 역사』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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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자 이영석 선생이 자신의 학문적 편력에 대해 쓴 책이다. 정년퇴임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이영석 선생이 쓴 책을 하나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삶과 학문을 정리하는 책부터 읽는 것은 상당히 어색한 일이다(찾아보니 이영석 선생이 번역한 책은 읽어봤다.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인데, 지금 보니 이 책의 번역에 대해 혹평을 했다. 아마 역사 전문가, 특히 서양 사회사 전공자가 전염병의 역사에 대해 번역하는 것은 조금 버겁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애초에 이 책부터 집어 든 건 아니었다. 무슨 칼럼에선가 이영석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고(안타깝게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을 먼저 읽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이영석 선생이 어떤 역사가인지부터 아는 게 우선인 듯 싶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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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역사』를 읽으며 시종일관 드는 생각은 이영석이라는 역사가가 학자로서 참 성실한 연구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사, 그것도 영국 사회사 연구라는 그리 넓지 않은 분야를 전공했다. 전공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종종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연구가 아닌 다른 쪽에 관심을 가져 일탈할기도 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그 분야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으며 꾸준하게 논문을 쓰고 발표하고, 책을 쓰고, 번역하는 작업을 평생 해왔다. 커다란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니지만, 다소 고지식한 연구자라는 평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가치에 대해 믿음을 잊지 않았다.


또 인상 깊은 것은 자신의 부족했던 점에 대해 매우 솔직하다는 것이다. 박사학위논문에서의 좌절감, 정치사에 무지했던 자신의 성향에 대한 반성,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미시사에 대한 생각 등을 꾸밈없이 피력하고 있다. 한국, 혹은 자신이 연구하는 사회사 연구가 유럽에서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고백 역시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인문학 연구자든, 과학 연구자든 자신이 수행한 연구의 가치를 과장하지 않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 책을 통해서 또 한 가지. 서양사, 특히 사회사의 연구 흐름과 시대에 따른 쟁점 등에서 알 수가 있었다. 비록 나는 역사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정통할 이유는 없지만, 연구의 흐름은 그 사회가 무엇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영석 선생이 자신이 그 흐름에 따라가기도 하고, 혹은 뒤처지기도 하면서 수행한 연구의 주제들은 우리나라 역사가 아니라 영국의 역사이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이영석 선생의 다른 책을 읽을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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