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기까지 왔다. 천재를 낳은 도시에서, 행복, 신에 이어 철학에까지 에릭 와이너의 여정을 지그재그로 되짚어온 셈이다. 그가 이 나라, 저 나라,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하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 나눈 방식이 엄밀한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니었듯이 나도 엄밀한 계획을 가지고 그의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여정이 아무런 의미 없는 순서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었고, 나의 독서도 조금은 의미를 가졌다. 나름으로는 조금씩 본질적인 것에 다가가려고 했다(지금 보니 의도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행복보다 철학이 본질인지 의심스럽고, 어쩌면 깊은 곳에서 말단으로 나가는 게 맞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읽으며 이 독후감의 제목을 몇 개 생각해봤었다. 그걸 화두로 이 책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우선 “기차 타고 철학‘.
모든 장의 앞에는 에릭 와이너가 기차(혹은 그 비슷한 것)를 타고(혹은 기다리며) 느끼는 것을 적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다.
섬에서 태어났으니 기차는 구경도 못해보다 나이 오십 줄에 들어 거의 매일 기차를 탄다(지하철이 아니다).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서 남들은 힘들겠다고 하지만, 난 별로 그렇지가 않다. 기차 안에서 여러 가지 것을 한다. 물론 약 10~20분간 잠을 자지만, 주로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기에 기차 만한 장소도 없다. 누구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독서를 그치게 할 요소도 별로 없다. 그저 내가 끊고 잠깐 눈을 붙이거나 창 밖을 보는 경우가 책에서 눈을 떼는 경우다(가끔 전화가 오거나 메시지가 방해하긴 하는구나). 그리고 책을 읽으며 여러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에릭 와이너처럼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서 읽은 것을 반추하는 기회를 갖는다. 집에서 책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조건이다. 더 집중된 상념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
에릭 와이너가 기차를 타고 철학자의 고장을 찾아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을 매개로 철학적 사색을 하는 것이 십분 이해된다. 철학하기에 기차는 딱!이다.
다음은 ”삶의 태도로서의 철학“이다.
에릭 와이너가 철학, 또는 철학자를 소환하는 이유는 수천 년 동안의 철학 사조의 흐름을 꿰뚫고 그것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게 아니다. 삶의 고비고비마다(책은 새벽, 정오, 황혼으로 나누고 있다) 철학자의 사고 방식과 가르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침대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이나(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삶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지는 방법(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가 설파한 인생을 즐기는 방법, 간디처럼 싸우는 방법(물론 비폭력) 등등이다.
철학자가 속한 학파를 깊게 소개하거나, 그들의 철학을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통해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야기한 철학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의 존재 이유가 그런 것이듯.
이런 제목도 생각해봤었다. ”철학의 존재 이유“.
고등학교 때쯤인가 100세 철학자 김형석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에세이집이었다.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미 죽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분석하는 게 철학자의 일이 아니라면 철학이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글을 쓰는 게 철학자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철학과에서 배출하는 졸업생들이 철학사학자가 되는 것인지, 진짜 철학자가 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죽은 철학자의 철학을 잘 설명하는 것이 살아 있는 철학자의 일이라면, 철학자의 존재 이유는 뭘까? 철학자는 삶에 대해서 나름의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깊게 사유하고, 또 얘기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이것도 확실한지 잘 모르겠다), 지금 살아 있는 철학자들은 그런 일을 하는 걸까?
에릭 와이너가 소개하는 열 네 명과 같은 ’죽은‘ 철학자를 통해서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화두를 잡을 수 있는 것일까?
에릭 와이너는 보통의 의미로 철학자로 불리지 않는 이들도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간디와 세이 쇼나곤 같은 이들이다(세이 쇼나곤은 정말 처음 듣는다). 에릭 와이너도 그걸 의식했는지 자신이 왜 그들을 철학자로 봤는지를 설명한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그들의 글이 어떤 삶의 지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간디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세이 쇼나곤은 주변의 것을 세심하게 바라보는 자세와 그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자세를 알려준다. 그것이 철학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면 철학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역시 에릭 와이너가 말하고 있듯이 한 철학자의 가르침은 다른 철학자의 가르침과 상충되기도 한다. 한 철학자의 가르침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철학자의 가르침을 읽으면 그게 덮여버린다. 아무리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에피쿠로스의 가르침과 스토아철학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몽테뉴가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줬다고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처럼 굳건한 존재가 아니다. 그게 우리가 철학자가 아닌 이유이고,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결국 이 독후감의 제목은 ”기차 타고 철학“으로 정했다.
끝으로 책의 전체적인 흐름과는 상관없이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두 개만 인용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