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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한국 사회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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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주 출신이다. 나는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없는데,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 그중에서도 사투리에 관한 얘기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가 없다. 그의 문제 의식은 고종석이 우리나라의 언어가 단일하지 않다고 한 것과 연결된다(저자 소개에 백승주는 고종석을 선생이라 칭하고 있다). 서로의 말을 해석해주는 매개자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같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방영하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명 한국어인데 자막이 나오지 않는가?


내가 제주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가끔 사투리를 해보라고 할 때가 있다. 난 안 한다. 말이라는 게 의사소통의 도구이지, 어떤 구경거리이지는 않은가? (모르는 이들에게 내 고향이 어디인지 맞춰보라면 맞추는 이가 거의 없다) 제주에 가면 사투리를 쓰냐고 묻는다. 쓴다. 아주 잘.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이지 않은가? 부모님과 잘 의사소통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곤란한 상황이 있긴 하다. 많은 ‘육지’ 사람이 있는데 고향 사람과 만났을 때다. 둘만 있으면 가끔 사투리를 쓸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서울말’을 쓴다. 역시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다.


이건 문어와 구어의 차이를 넘어선 것이기도 하고, 그 차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서울말’로도 구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지만, 사투리를 문어로 적지는 않는다(‘못한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서울말’과 사투리를 때와 장소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하여 쓰는 것이 어쩌면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고, 편리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승주는 여기에 대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방송에서 강호동은 경상도 억양을 잔뜩 담아 얘기할 수 있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노골적으로 쓰는(혹은 쓸 수 있는) 진행자는 거의 없다. 나는 나의 말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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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는 ‘사회언어학자’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짐작이 간다. 말을 연구하는데, 그 말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 지위 등을 연구하는 것일 게다(혹시 몰라 찾아봤는데,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되어 있다. “언어를 사회적 요인과 관련지어 연구하는 언어학”). 그래서 그는 당연히 언어와 사회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있다. 혐오의 언어가 파괴하고 있는 것들, 언어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노리는 것들, 외국인들이 배우는 한국어에 관한 것들(그는 교수가 되기 전 한국어교육원의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사회와 연관된 언어, 특히 한국어는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 권력에 대단히 취약하며, 착취의 언어로도 곧잘 작용하며, 아주 자주 차별의 언어가 된다. 그건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나아가 사회의 문제다. 우리가 쓰는 말이, 언어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굳이 따지고 들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또 모르는 것들도 많다.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건 내가 기득권층의 일원이 되어버렸다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못함에도 그 자리를 노리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익혔다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남이 쓰는 말을 점검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그게 그것을 강제적으로 조절하고 바꾸려는 욕심이 문제다. 점검은 반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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