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네토박터 속에 속하는 종(species) 중에는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A. baumannii) 말고도 사람 이름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름이 적지 않다. 여기서는 그중 두 개의 종에 대해서 얘기하려는데, 바로 Acinetobacter seifertii와 Acinetobacter kookii다. A. seifertii는 2015년에야 발표되고 종으로 인정받은 세균으로 Harald Seifert라고 하는 독일의 미생물학자의 이름에서 왔고, A. kookii는 2013년에 우리나라의 국윤호 교수의 이름을 따서 발표된 종이다. A. kookii가 먼저 발표되었지만, 얘기는 A. seifertii부터 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모두 나와 관계있는 얘기다.
일단 배경 설명부터 하자면 이렇다. 아시네토박터 속의 종들에 대해 오랫동안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관심이 많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처음 아시네토박터 속의 종들을 구분할 때 DNA 혼성화 정도에 따른 유전적인 거리에 따라서 분류했기 때문에 유전적 종, 즉 “genomic species (또는 genomospecies) 몇 번”, 이런 식으로 이름이 붙었었다. 기준 종인 (type species)인 A. calcoaceticus나 가장 많이 분리되는 종인 A. baumannii 외에 몇몇 종은 이름도 붙고 특성도 기재되었지만, 다른 것들은 오랫동안 종도 아니고, 종이 아닌 것도 아닌 묘한 상황으로 남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A. pittii와 A. nosocomialis였다. 이것들은 각각 Acinetobacter genomic species 3와 13TU라고 불리던 것들인데 2011년에 이르러서야 Alexandr Nemec 등에 의해서 유전적, 형태적 특징이 기술되면서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 A. pittii와 A. nosocomialis는 A. baumannii와 상당히 유사한 종으로 이름이 붙기 전부터 A. calcoaceticus-A. baumannii complex, 또는 A. baumannii complex 라고 하는 그룹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아시네토박터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게 2006년 정도부터였다. 아시네토박터에 대한 연구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활발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어떤 종들이 있는지 항생제 내성은 어떤지 등 기초적인 것부터 알아야 했다. 당시 병원의 미생물검사실에서는 종 수준까지 분류해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 동정(species identification)부터 해야 했다. 대부분 A. baumannii일 거라고 예상했는데(병원의 미생물검사실에서는 그렇게 동정하고 보고해왔으니까) 웬걸 이것들이 여러 개의 분명한 그룹으로 나눠지는 것이었다. 일단 subgroup I, II, III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눴다. 이 중 subgroup I이 진짜 A. baumannii였고, subgroup II는 당시 Acinetobacter genomic species 13TU라 불리던 것이었다(나중에 이게 A. nosocomialis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문제가 subgroup III였다. 이건 아무리 분석해도 genomic species 번호도 붙여져 있지 않은 group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보고된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년 궁리하다 새로운 종으로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특징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체코의 Nemec 박사의 논문이 발표된 것이다. A. nosocomialis, A. pittii라는 종을 새로운 만든 것도 그였는데, 아시네토박터 속의 종들에 대한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는 이였다. 그가 A. seifertii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종에 대한 논문을 봤더니 그게 바로 내가 새로운 종으로 발표할까 고민 중이던 그 세균들이었다. 내가 한두 발짝 늦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종의 이름을 차지한 Harald Seifert는 누굴까?
Seifert는 독일 쾰른에 위치한 University Hospital Cologne 교수로 주로 병원 감염과 항생제 내성 세균 감염에 대해 연구해 왔다.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고, 지금도 많은 논문의 공저자로 참여하는, 활발히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미생물학자이다. 그가 발표한 논문 가운데 거의 절반이 아시테노박터에 관한 논문일 만큼 그의 주요 연구 대상은 아시네토박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시네토박터 연구는 분자 역학, 항생제 내성이나 독성, 임상적 영향 등에 관한 것인데, 특히 독일을 비롯한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의 연구자들과 함께 논문을 내고 있는 등 국제적으로 공동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Alexandr Nemec이 자신이 발표하는 종에 Seifert의 이름을 붙인 건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가 아닌 것 같다. 체코 태생의 Nemec은 현재 체코의 Charles University 의학과에 재직 중인데, 2003년 이래 그는 여러 아시네토박터 신종을 발표해왔다. Seifert 말고도 여러 미생물학자의 이름을 아시네토박터의 종 이름으로 제안했는데 (A. bereziniae와 A. guillouiae은 프랑스의 Eugenie Bergogne-Berezin와 Marie-Laure Joly-Guillou, A. beijerinckii는 독일의 Martinus Willem Beijerinck, A. gyllenbergii는 핀란드의 Helge G. Gyllenberg, A. courvalinii는 프랑스의 Patrice Courvalin, A. vivianii는 영국의 Alan Vivian), 이들의 국적을 보면 프랑스, 독일, 핀란드, 영국 등으로 다양하지만 모두 미생물학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중 Acinetobacter를 연구한 이는 Seifert 말고는 P. Courvalin 정도일 뿐이다. 어쩌면 자신이 기념하고 싶은 사람을 남들에게 각인시키는 방법이 이처럼 새로운 종에 그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Harald Seifert
A. kookii는 내가 발표한 종이다. 이 종을 발표한 논문을 보면 방금 얘기한 H. Seifert가 공저자로 참여했다.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 연구팀은 토양이나 생활 환경 등에 어떤 세균들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연구 과제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 연구를 통해 토양에서 분리된 아시네토박터 속에 속하는 균주 중에 기존에 발표된 종과는 다른 것들이 있었다. 세균의 종 동정에 가장 널리 쓰이는 16S rRNA 유전자 염기서열을 조사한 결과와 다른 유전자들(rpoB와 gyrB)의 결과가 모두 새로운 종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밖에 생화학적 특징이나 표현형의 특징을 조사해서 신종 발표를 준비했다. 균주들을 한국과 일본에 있는 공인 기탁 기관에 기탁하고, 염기서열도 등록한 후 논문 원고를 써서 미생물 신종 발표의 공식적인 저널인 IJSEM (International Journal of Systematic and Evolutionary Microbiology)에 투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의 Dijkshoorn 교수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날아들었다. Dijkshoorn 교수는 아시네토박터 연구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물론 Dijkshoorn 교수의 이름을 딴 Acinetobacter 종도 있다) 그가 내 논문을 심사하는데 편집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가 내 논문 원고를 심사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 논문을 봤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균주들과 내가 신종으로 발표하려고 하는 균주들이 같은 종에 속하는 균주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균주들은 독일, 네덜란드,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서 분리한 것들이었는데, 필요하다면 보내줄 테니 분석하고 논문에 함께 언급해달라는 것이었다. 논문의 저자는 공동저자면 만족한다는 말과 함께.
좀 놀랐다. 그가 좀 비양심적이라면 우리 논문을 깔고 앉은 다음 먼저 발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사실 그런 일은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면 우리 논문은 그대로 진행하더라도 자신들의 균주를 가지고 또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직하게 상황을 얘기하고, 균주까지 보내줬다. 자신을 포함한 세 명만 공동저자로 포함시켜 된다는 조건뿐이었다. 그 명단에 Seifert가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Acinetobacter 연구의 대가들과 에르되시 수(Erd?s number)가 1이 되었다.
그때 발표한 신종이 바로 A. kookii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세균의 종명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국윤호 교수님의 성을 따라 지은 것이었다. 나는 국윤호 교수님 연구실에서 박사후(Post-doc) 연구원으로 일했었다. 그분이 아시네토박터를 연구한 적은 없었지만, 세균 신종을 발표하면서 어떤 세균에든 그분의 이름을 넣고 싶었다. 약 열 종의 세균 신종을 발표했지만 모두 지역이나 기관 등의 이름을 이용해서 종명을 지었는데, 내가 사람 이름을 세균 신종에 넣은 것은 이 A. kookii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국윤호 교수님은 작년에 정년 퇴임하셨는데, COVID-19 탓에 퇴임 기념 강의도 온라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