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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태평양전쟁까지, 과거에서 미래를 본다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by ENA

16세기 임진왜란에서부터 20세기 태평양전쟁까지 500년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국가의 각축과 조선의 대응을 한, 중, 일이라는 3국의 관점에서 시야를 넓혀 대륙과 해양 세력이 맞붙은 역사로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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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라는 지역을 종종 유라시아 동해안으로 지칭하고 있는 게 눈에 띤다. 근대 이후 세계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동아시아를 의미하는 듯도 하고, 세계사적 차원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관점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분명하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음 접하는 개념이라 눈에 띠었다.


젊은 학자답게 도발적인 질문으로 글의 포문을 열고 있다. 한반도가 과연 전략적 요충지인가? 라는 질문이다. 모든 교과서에서 의문의 여지없이 강조해온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한반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얘기로 들린다. 한반도가 전략적 요충지라면 그건 시대에 따라 변함이 없는, 고정된 진실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조건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를 면밀히 보자는 얘기다. 저자는 16세기 이전까지는 한반도 자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본다(그래서 한민족의 중국도, 몽골도 직접 지배 대신 간접적 지배, 혹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택했다고 본다). 그러다 일본이라는 ‘플레이어’(이런 표현도 역사책에서 처음 본다)가 등장하면서 대륙과 해양이 맞붙는 지역이 되었고, 비로소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등장했다는 것은 바로 임진왜란을 의미하는데, 임진왜란은 일본이 대륙을 향한 세 번째 시도로서 그제서야 한반도는 대륙을 향하는 길목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이후로 한반도는 20세기까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완충 지대로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다른 책이라면 이 시기에서 19세기로 몇 가지 지점만 짚고 바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책은 그 사이의 동아시아의 역사를 요모조모 다 짚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일본에서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임진왜란이 불러온 연쇄 효과로서 누르하치의 부상과 청 제국의 건설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누르하치와 청 제국의 부상에 대해서는 임용한의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에서 자세히 읽은 바가 있지만). 청에 의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한반도 문제가 일단 종결되었다는 시각 역시 상당히 도전적이다. 말하자면 그 동안 격동의 역사였던 데 비해 청에 대한 조선의 굴복으로 동아시아가 상당한 기간 동안 안정적인 형국을 띠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가 아닌가 싶다.


한 가지 인상 깊은 부분을 지목하지면, 조선과 일본에서의 가톨릭에 대한 내용이다. 2개의 장에 걸쳐서 쓰고 있는데, 읽으면서는 저자가 분명히 가톨릭 신자라고 여길 정도였다(스스로 밝히길 어떤 종교의 신자도 아니라고 한다). 새로운 질서로서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조선과 일본에서 받아들여졌는데, 둘 다 탄압을 받았지만(가톨릭 신앙은 종교로서 인식된 게 아니라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정권 측에서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정착한 것은 한반도였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자가 생겨난 한반도 말이다.


제국주의가 유라시아 동해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을 다루는 부분의 역사 내용 자체는 크게 특이하지 않다(역사는 그렇게 있었던 것이니). 하지만 세력의 충돌이라는 면에서 더 강조를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각국이 가졌던 아이러니한 면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기도 하다) 조선의 독립 유지를 가장 원했던 국가가 바로 러시아였다는 점이다. 물론 러시아가 선(善)한 의도를 가져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그 편이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도 역시 아이러니한 면이 있는데,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인도나, 베트남 등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아시아 국가가 유럽 국가를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찌 생각해야 할지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논리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결코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일본의 어떤 학자의 탄식처럼 서양도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는데, 평화롭게 있을 때는 야만인 취급하더니,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나니 오히려 문명국 대우를 하더라는 아이러니도 있다.


저자는 동아시아 500년사가 바로 ‘삼국지’가 아니라 ‘열국지’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대에도 한, 중, 일. 혹은 한, 미, 일 등 몇 국가만을 우리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국가로 상정하고 그에 대해서만 신경 쓰는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또한 자뻑과 자해 모두 경계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만 역사를 해석하고, 다른 나라를 바라보려는 자세를 질타하고 있다. 반발심이 튀어나오다가도 그게 틀린 얘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욱여넣고는 했다. 역사는 이미 결판이 난 바둑을 복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이 역사는 처절하게 진 게임이다.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편치 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복기는 필요하다. 똑같은 게임이 벌어지지 않지만, 제대로 한 복기는 다음 게임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터이니.


저자가 분명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책은 가끔씩 다른 데를 갔다 오고 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자랑하는 느낌도 좀 들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저자가 많은 것을 깊게 연구해왔다는 걸 알 수 있고,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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