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머물다 떠나는 장소에, 만남과 헤어짐의 끝에, 그리고 삶의 자국.
그렇다는 걸 누구나 다 안다. 나의 생물학적 자국, 내 존재의 상징물, 사랑했던 이의 마음 속에 남은 잔상, 그리고 내가 죽으면 당분간 남을 나에 대한 기억.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는 적다. 아니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거의 없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급급한 우리는 늘, 어떻게든 자취를 남기지만 그 자취의 질과 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서 미래로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어느 지점을 잘라, 어느 장소를 택해, 혹은 어떤 이의 마음 속을 헤집고 단면을 살펴보는 일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스벤 슈틸리히가 이 책에서 한 일이 그런 일이다. 우리가 떠난 자리, 우리가 누군가를 떠날 때,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기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철학적이고, 감상적이지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다중성 때문일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일인 것 같지만, 결국은 과거를 살아왔고, 현재를 살아가는 굉장히 현실적인 일인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 아마 그럴 것이다, 라는 말로 퉁!쳐 버리기에는 아득하고, 또 너무나 중요한 미래가 있기에 때로는 철학적으로, 때로는 현실적으로, 감성적이 되었다가 다시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는 자국을 남기지만, 이 책은 종종 그런 자국을 남기길 원치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건 또 뭘까?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현실에 대한 도피?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결국은 그러한 자국을 남기길 원치 않는 이들의 시도 역시 어떻게든 자취를 남기게 마련이다. 그건 지독한 감옥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 내지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속도가 종종 느려졌다. 나라는 존재가 남긴 자취를 되새겨볼 수 밖에 없었다. 어릴 적 시골 학교 창문에 남겨두었던 내 지문은 사라졌을 것이지만(그 학교 교사가 옮겨 갔으므로), 그 자리에 생긴 주차장 한켠의 돌멩이는 내 눈길이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주점의 한 구석방에서 토해내던 어설픈 주의, 주장들도 생각났고, 책마다 안쪽에 써넣었던 네 줄짜리 글귀도 떠올랐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장면을 떠올리려 했으나 그건 잘 되지 않았다. 책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은 잘 의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어떤 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왜 그랬을까?... 우습게도 내가 죽은 후에 남겨질 사람보다 책들이 먼저 떠올랐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허나 나의 책들은 생명력을 잃고 말 것이다. 나의 육신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듯 나의 정신을 만들어간 책들 역시. 공포스럽진 않지만, 육신과 함께 사그러들 정신이 책들로 상징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내 사무실을 뒤덮어가는 책들이 안쓰러웠다.
인터넷이라는 공간 때문에 자취가 더 선명하고, 더 어지럽게 남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존재가 남기는 자취에 대해 깊게 사고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남긴 자취, 앞으로 남길 수 밖에 없는 자국에 대해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