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 박사(또는 작가, 또는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도무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사물이나 상황을 연결시켜낸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 해도 통쾌한 느낌이 들 정도다. 1500년 전 아랍의 이야기인 『천일야화』에서 현대 문명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알고리즘을 이끌어내는 것이나, 허균의 <망처숙부인김씨행장>이 어찌어찌해서 화약까지 연결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럼 그런 상상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상상력은 자유로운 사고 능력에서 올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가 한 권의 책이 다양한 책으로 연결되고, 그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들이 다시 또 많은 책으로 확장된다. 책들은 하나의 노드(node)가 되고, 허브(hub)가 되어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그렇게 처음에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사물과 상황이 연결되어 간다. 바로 그게 상상력이 되는 것이다. 물론 많이 읽는다고 해서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곽재식 박사의 경우 그가 읽은 책들은 그의 상상력의 토대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화성 탐사선을 탄 걸리버”란 이 책이 그런 상상력의 토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들은 모두 대체로 고전이라 불리는 책에서 비롯된다. 『길가메시』가 그렇고, 『일리아스』, 『변신 이야기』가 그렇다. 제목만 보았을 때 이 고색창연한 고전에서 ‘기후변화’, ‘금속학’, ‘콘크리트’와 같은 현대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끌어낼지 궁금했다. 그런데 결국은 고전과 현대의 사물, 현상을 연결시켜내고야 만다.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니면 쓰다보니 그렇게 연상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길가메시』에 기후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기후변화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망처숙부인김씨행장>이나 『오 헨리 단편집』에는 화약이나 전봇대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조금은 비약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연결, 혹은 작은 비약이 즐겁다.
그렇다면 그 연결, 비약이 중심일까? 또 그렇지도 않다. 각 꼭지에 담긴 이야기의 2/3 이상이 책에 관한 이야기, 그 책과 관련한 이야기, 사회, 역사 이야기다. 그런 다음에야 과학이 등장한다. 바로 기후변화, 금속학, 콘크리트, 알고리즘, 시계, 화약, 항해술, 증기기관, 전봇대, 질소 고정, 자동차, 냉장고, 화성 탐사선이 그것들이다. 그는 이 과학을 고전에 빗대어 무리하게 비판하지 않고, 문명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다만 고전을 통해서, 또 그와 관련한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 과학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을 발휘할 뿐이다. 고전을 재미있게 읽을 방도로 과학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현대 과학을 잘 이해하는 토대로 고전을 읽을 수도 있다. 세상이 오래 전부터 서로 엮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그저 종횡무진하는 저자의 상상력을 즐길 수도 있다.
솔직하게 말해, 곽재식 박사가 읽은 책들은 내가 거의 읽지 않은 책들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의 반다나 싱을 제외하면 너무나 익숙한 저자들이고 책들이다. 사실 『걸리버 여행기』나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책은 읽었다 하기도 그렇고, 읽지 않았다 하기도 그렇다(어릴 적 어린이용으로 나온 책을 읽었으니). 오 헨리의 단편집은 몇 편의 단편을 읽었으니 읽었다고 해야 할 지도 그것도 애매하다. 그건 『천일야화』도 마찬가지고, 『수호전』도 마찬가지다. 내용을 대충 알고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나 『일리아스』는 또 어떤가. 이렇게 보면 내가 고전이라는 것을 소비하는 행태가 눈에 보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도 그리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을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서도 다르겠지만, 그것들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도 분명해 보인다.
뭐, 그런 깨달음도 좋지만, 일단 즐거운 독서였다. 나도 곽재식 박사를 따라 마구마구 시간을 넘나들며 즐거운 시간 여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