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융크의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첫 시험 현장에서 폭발의 위력을 보고 맨하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관제소 안의 한 기둥을 붙들고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천 개의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여기까지는 희망의 언어였다. 그는 원자폭탄의 구름버섯을 보며 희망을 가졌을까?
그러나 불길하고 거대한 구름이 솟구쳐 오르자 다른 구절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된 원자물리학자들의 공적과 개인들의 역사를 추적한 로베르트 융크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오펜하이머가 떠올렸다는 구절의 첫머리를 사용했다. 그러니 제목만 보면 이 책은 밝은 세계를 그리는 것 같지만, 실은 오펜하이머가 그 구절을 떠올렸을 때의 감정처럼 긍정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로베르트 융크의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1956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출판 시점이 갖는 의미는 이 책이 상당한 현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10년이 갓 지난 시점이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거의 다 생존해 있던 시기였고,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가 있었다(아인슈타인은 막 고인이 되었던 시점이다). 원자물리학의 발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첫머리는 그 얘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원자물리학의 결과물,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인 원자폭탄(수소폭탄까지)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과학자 사회의 대응에 대해서 연대별로 쓰고 있다. 그것은 과학의 역사이기도 하고 과학자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과학과 정치 사이의 역사이기도 하다(물론 그 관계는 일방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과정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능력과 고뇌에 대해서 쓰면서, 그들의 욕망과 좌절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출판된 지 벌써 60년도 더 지난 이 책이 아직도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거쳤던 과정을 지금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경험하고 있으며,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 과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건 과학이 사회와, 정치와 맺는 관계이지만, 결국은 과학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과학은 진실을 찾는 것인가, 그것을 해석하는 것인가, 그것을 적용하는 것인가. 당시의 원자물리학자들이 나치의 세계 정복 위협에 맞서 원자폭탄 개발에 적극 참여했을 때, 그들은 과학을 하고 있던 것일까, 과학을 이용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일까? 그 구분은 애매하다. 그렇지만 애매하기 때문에 그 후로 지속적으로 제기할 수 밖에 없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오펜하이머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데, 그에 관한 두꺼운 평전 『아메리카 프로메테우스』를 읽고는 나는 그가 프로메테우스라기보다는 파우스트에 가깝다고 썼었는데(http://blog.yes24.com/document/8271623), 이 책을 읽고는 더욱 그 생각을 굳히게 된다. 과학자는 파우스트가 되기 쉽다는 생각도 함께. 그들이 만들었지만, 통제력을 상실해버린 대상을 놓고서도 과학을 위해서, 혹은 연구비를 위해서 굴종해야만, 내지는 침묵해야만 했던 상황을 현재의 과학자들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흔한 모습이다. 내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로베르트 융크는 결국 과학자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질문은 “당신은 국가에 충성했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인류에게 충실했습니까?”였다(530쪽)고 일갈한다. 어떤 이들은(아니, 많은 이들이) 여전히 국가에 충성하는 과학자를 요구하겠지만, 과학자의 활동이 국가의 이익과 인류의 불행 사이에 놓여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이 책은 추천자 홍성욱 교수가 쓰고 있듯이 적지 않은 논란점도 갖고 있는 책이다. 바로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있어서 하이젠베르크의 역할이 그것이다.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에 놀란 과학자들이 미국 정부(직접 대통령)를 설득해서 원자폭탄 개발에 나섰는데, 정작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로베르트 융크는 하이젠베르크의 변명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하다. 그가 일부러 원자폭탄 개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태업이라는 건데, 그 후의 연구를 보면 태업이 아니라 열심히 하려 했지만 잘못 계산했다는 게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인상 깊은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태도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협력하는 척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변명. 그 과학자의 변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해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