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의 제목들을 보고, 어쩌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지, 하며 조금은 남감했다. 제목이 ‘쾌락주의’를 표방했으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첫 절의 제목부터가 “인생에는 목적 따윈 없다”다. 게다가 조금 눈을 내려서 보면 4장의 제목은 <성적 쾌락의 연구>다. 이 책은 다른 거 없이, 그저 인생을 즐기면 된다, 그것도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주장하는 책인가, 싶은 것이다. 그게 ‘철학’이라고?
자, 일단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읽어 본다.
일단 상당히 과감하다. 심지어 1965년에 나온 책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 당시 일본 사회의 분화기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얘기를 과연 어느 정도나 수용할 수 있었을지 궁금할 정도다. 그러고 보니 시부사와 다쓰히코는 ‘사디즘(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의 책을 번역해서 출판한 것으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이 책을 쓰던 무렵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었고, 아마도 그런 상황에 대한 반감 같은 것도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내용은 상당히 강도가 높은 데 반해, 분위기는 밝은 편이라는 게 내 느낌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투가 아니라 이러는 게 좋지 않으냐, 그게 인간의 본성이 맞는 것 아니냐는 투다. 그래서 이 과감한 내용을 지금도 가벼운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생각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쾌락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드러나지 않는 본성이야 어떤지 나도 잘 모르지만 성적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시부사와 다쓰히코라면 아마도 그걸 억누르는 걸 비꼬고, 제발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라고 하겠지만, 나라면 모든 걸 다 드러내는 게 능사가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양반의 얘기가 지금도 어떤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고, 따라서 지금도 유효한 얘기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60년 전의 얘기가 지금은 그저 심드렁한 얘기가 되어버렸다면 지금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어졌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좀 순진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를테면 당시의 대중문화 흐름(무드라고 표현하고 있다)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철학을 통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주말마다 레저 생활을 하는 것이 별 의미 없다고 보고 있고, 그것이 유행과 같이 여기고 있지만 대중문화는 그런 걸 대세로 만들었고, 또 그것으로 경제가 지탱되는 측면도 커졌다. 말하자면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철학은 과감했고 지금도 유효할지 모르지만 좀 낙관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하기야 쾌락주의 같은 철학을 피력하는 데 낙관적이지 않으면 좀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쾌락주의의 거장들”이 가장 인상 깊다. ‘술통 속의 디오게네스’, ‘술의 시인 이백’, ‘독설가 아레티노’, ‘행동가 카사노바’, ‘사드와 성(性) 실험’, ‘괴테와 연애문학’, ‘브라야 사바랭과 미식가들’, ‘반역아 와일드’, ‘기인 알프레드 자리의 인생’, ‘장 콕토와 아편’. 알았던 이도 있고, 전여 몰랐던 이도 있는데, 저자가 어떤 삶을 부러워하는지 잘 드러나기도 하거니와 이들의 삶 자체가 흥미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을 모두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무리가 아닌가 싶은데, 그 얘기는 쾌락주의란 것이 하나의 일관된 철학이라기보다는 여러 삶의 태도를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얘기하듯, 유혹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독불장군처럼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오해받을까봐 주저하지 않으며,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노동을 즐기며...
말하자면, 이 책은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자는, 일종의 선동이다. 즐거운 선동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몇 가지는 가끔 생각나며 일탈을 꿈꾸고, 또 실행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