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운명인가, 하고 생각할 때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걸 잘 믿지는 않는다.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은 여기서 운명을 믿지 않는다는 게 ‘본성(nature)’이라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나는 일단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식의 사고를 배격한다.
슈테판 클라인의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바로 그런 운명이란 게 존재해서 우리의 삶과 사회를 조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누군가를 운명처럼 만났다든가,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것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우리의 뇌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관을 짓고, 인과 관계를 만들었을 때의 진화상의 잇점이 있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에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 운명의 바탕에는 우연이라는 과학이 있다.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우연이다. 우연은 포괄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즉 통계적인 시각에서 파악했을 때 그것들의 법칙성이 드러날 뿐이다. 그것 자체로는 예측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지금 책상 앞에 이리저리 쓸리고 있는 100원 짜리 동전 하나를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나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확률이 1/2이라는 것만 ‘대충’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그것을 위로 던졌을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을 거의 100%의 확률로 예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물리의 법칙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정확히 떨어질 지는 수많은 우연이 가담해서 결정될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살아간다.
우연은 불확실함을 의미한다. 사실 그래서 우리는 우연을 제거하고, 어떤 규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슈테판 클라인은 우연을 통해서만 세상에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새로운 것이 세상에 등장해서 우세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행운이 따라야 하며, 또 어떤 계획이 필요하지만, 거기에도 우연적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 즉 우연으로 가득찬 삶,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슈테판 클라인은 우연의 존재를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하며, 잘 이용해야만 불확실한 세상을 조금 더 잘 살아갈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안전에 대한 확신보다는 우연히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안전 시설을 확충하고, 더 신경쓰며, 안전에 대해 생각하고 조심할 수 있다. 선택 상황에 있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고려해서 선택한다는 것은 운명론적 사고다. 불확실한 우연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레시피에 따라 빠르고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이 나을 때가 많다. 모든 것을 생각해서 결정하다가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것은 단지 그냥 빨리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기준을 정한 후에 그것이 의미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결정했을 때 더 나은 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나는 다 읽고도 이 책이 신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 서점의 책 안내를 보니 17년 만에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이 책에서 하는 얘기가 17년이라는 시간과는 그다지 상관없다는 의미다. 운명이라는 생각과 우연의 세계에 대한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의미가 있다. 세상에 대한 불안과 허무를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 뒷면이 나오면 실망하는 운명적 태도가 아니라, 앞면이 나올 가능성과 뒷면이 나올 가능성은 같지만, 그중 어느 것이 나올 지는 늘 우연적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