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굴욕을 겪으며 자신의 우주관을 철회하고 반성의 말을 하고난 후 돌아서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것은, 지금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종교에 대한 이성, 과학의 굴복할 수 없는 정신을 표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633년 예순아홉 살의 갈릴레오가 로마 교황청의 이단심문소에서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던 것은 전해에 출판한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책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른바 천동설)에 반대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과학(이른바 지동설)을 옹호하였고,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미 갈릴레오는 1616년 약식 재판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설파(《태양 흑점 서신》)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럼에도 1632년 종교의 서슬이 시퍼러던 시절에 감히 《대화》란 책을 내게 된 것은 자신의 친구이자 새로운 과학에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우르바누스 8세가 교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어느 정도는 용인받을 수 있을 거라고 (결국은 잘못된)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갈릴레오도 무척 신중했다. 표제지에 “나흘 동안 두 가지 주된 세계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관하여 그 철학적 및 자연적 원인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논하다.”라고 적었고,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옳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시종 하나의 가설로 설정하였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살비아티,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주장하는 심플라치오, 그리고 사회자 격인 사그레도의 이야기를 듣고 독자들의 판단을 구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는 셋째 날 이야기 마지막에 “어떤 이론이 더 그럴듯합니까?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보시지요.”라고 했다. 물론 누가 옳은지에 대한 그의 의도는 누가 봐도 분명하긴 했다.
실상 갈릴레오는 기존 질서에 반항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권력에 기대어 대학과 궁정에서 직장을 얻고자 했고, 더 많은 수입을 위해 국가를 옮겨다니기도 했다.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가의 별들”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가르침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과학적 진실이라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정말 다양한 장치를 두어 조심했던 것이다. 그런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것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명백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소환되어 ‘중대한 이단 혐의’ 판정을 받고 무기한 가택 연금에 취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릴레오 재판에 관해서는 상당히 잘 알고 있지만, 과연 그 연원이 된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책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요즘 갈릴레오의 책을 직접 읽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오철우의 이 책은 갈릴레오의 ‘그 책’을 둘러싼 여러 상황과 함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서 중요한 대목을 읽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함께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왜 갈릴레오가 위대한 과학자인지, 어떻게 과학적 진보를 향한 위대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갈릴레오는 신이 만들어 놓은 체계, 자연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식적 경험이 아니라 이성과 수학의 힘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단순성과 개연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 우주에 대한 보다 합당한 설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갈릴레오의 모든 주장과 근거가 옳았던 것은 아니다(대표적인 것이 넷째 날 주요 주제였던 밀물과 썰물의 원인이다). 그리고 단순히 그가 주장한 지동설이 옳았기 때문에 갈릴레오가 위대한 과학자인 것도 아니다. 그가 그런 앎에 이르는 과정이 과학적이었고, 그런 과학적 태도가 근대 과학 혁명을 촉발했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위대한 과학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