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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Jul 28. 2018

데인저러스 매소드(2011) - 상담자는 완벽한가?

프로이트와 칼융이라는 상담심리학의 선구자를 통해 영화 살피기

 우선 이 영화에는 정신분석학 및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구스타프 융 그리고 그들이 치료하며 관여했던 사비나 슈필라인이라는 아동발달심리학자가 나온다. 영화의 서사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는 가정이 있는 정신과 의사 융과 그의 임상 치료 환자 슈필라인 간의 역전이가 굉장히 기이하고 부적절한 관계로까지 이어지는 멜로라인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융과 프로이트의 학문적 유대관계에 관한 것으로 리비도에 관한 의견 불일치로 대립각을 이루며 서로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 영화를 보고 처음에 든 생각은 과연 상담자는 완벽한가? 라는 질문이다. 영화 내용으로만 한정 지어 생각해본다면, 상담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 중 한명인 프로이트는 그가 만들어 낸 이론과 그에 따른 권위가 흠집 잡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겁을 먹은 것처럼 묘사된다. 그의 정신 분석 이론이 과학적으로 완벽히 증명되어야 하며, 이론의 완벽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잡혀 호사가들로부터 공격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이론을 창시한 누군가에게 그의 이론은 자식과도 같이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삶에서 알게 되고 배운 모든 것을 응축하고 담아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을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융과의 논쟁 속에서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프로이트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긴 학자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그것을 붙잡으려하는 강도만큼이나 역설적으로 자유로움은 떠나간다는 것을 영화는 묘사한다. 이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강하게 쥐려고 하는 만큼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억압되며 자유로움은 떠나간다. 이는 결국 학문의 업적이나 명성과는 별개의 자유로움과 인간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프로이트의 모습과 그에 따른 질문은 나를 포함한 모든 상담자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즉 상담가가 자신이 공부한 이론이나 자신이 알게 된 모든 것들 그리고 자신의 학문 업적에 매달리면 매달리는 만큼 역설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영화 속 프로이트나 자신의 이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학자들 나아가서 개인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다. 그렇지만 그러한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영화 속 프로이트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뜨린 이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자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 또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어떠한 인간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상담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나는 이 영화에서 보았다. 상담자는 그리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그러한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할 때 프로이트는 융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며, 대화하며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완벽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융과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실로 아름답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이는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에게도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융은 이성적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그의 내담자들로부터 유발된 그의 욕망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미숙한 남성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면 그에게 풍족한 부를 가져다 준 그의 부인은 그의 이성만으로 판단을 한다면 행복을 주어야 되지만 그에게 답답함과 자유로움을 뺏어간 대상으로서 다가온다. 그렇게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던 융에게 환자로 다가온 ‘사비나 슈필라인’은 그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폭발시키는 마중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인간 내면의 욕망을 살라고 충고해주며 자신의 삶으로서 보여준 오토라는 인물 또한 융에게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융에게 일깨워 준다. 아마도 이 오토라는 동료의사이자 환자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다. 이러한 영화 속 장면을 통해 다시 한번 상담자에게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물론 오토처럼 극단적으로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은 상담자에게나 내담자에게나 위험한 요소일 것이다. 다만 오토라는 인간상을 통해 상담자가 알아야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온 느낌에 대한 정직성이 아닌가 싶다. 상담자 또한 인간이며 결코 완벽할 수가 없다. 특히나 자신에게서 올라온 느낌을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는 우리가 이 욕망과 느낌이라는 것을 정복하려고 해도 결코 정복할 수가 없을 말한다. 자신의 느낌과 욕망을 단지 알아갈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던 욕망과 친해지며 그 욕망을 통해 자신을 알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결국 융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인정되어야 하는 부분이며, 자신의 삶으로서 살아져야 되는 부분이다. 상담사가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다고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영화 속 융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며, 상담자이기 때문에 이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의 영화를 보며 나는 상담사는 완벽한가?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고 서두에서 이야기 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 융이라는 두 거장 또한 완벽하지 못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완벽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완벽함과 권위를 쫓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융으로부터 오히려 권위를 잃었고, 융은 자신의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이성만을 믿고 따르려고 하다가 자신의 이성을 뛰어넘는 욕망을 인정해야만 되는 인물들과의 사건들을 마주한다. 삶은 언제나 인간 개인의 유한성 그 이상의 것으로서 펼쳐진다. 이는 인간 개인의 불완전성, 부족함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더 큰 완전함, 온전함이 다가온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프로이트와 융이 받아들이지 않은 불완전한 삶을 우리는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단지 나의 불완전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나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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