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일기 모음
바야흐로 낙엽이 추적추적 떨어지기 시작하는 초가을.
본격적인 밴쿠버 어학연수생의 일상이 시작됐다.
지난 글에서 S프로그램의 담임선생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굿플레이스에 나오는 백인 천사 할아버지를 닮았다고만 했던가? 암튼 그가 그다.
벌써부터 눈에서 광기가 느껴진다.
근데 수업을 며칠간 듣고 나서 더 닮은 사람을 찾았다.
이 사람이다.
진짜 뭐 하나 틀릴 때마다 날 이렇게 쳐다본다.
어차피 한글 읽을 줄 모르니 그냥 쓰겠다. 이거진짜미친영감탱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S수업의 커리큘럼상, 매주 금요일에는 한 주 간의 수업을 마무리하며 5~10분 분량의 미니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그리고 매달 마지막 금요일은 한 달 간의 수업을 마무리하는 빅 프레젠테이션 데이이다.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는 동안에 선생님이 이렇게 코렉션을 써주고, 일대일로 피드백도 해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 게, 머리로 알고 있는 영어와 말하는 영어가 정말 다르다는 것. 써놓고 보면 진짜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말도 안되는 그래머인데 정작 말할 때는 발음 챙기랴, 단어 고르랴, 문법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자꾸 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 그럼 어김없이 날라오는 사자후. (??: What the heck did you say?)
뭐… 그래도 아직 첫 주니까.
계속해서 하다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눈 깜짝할 새에 한 주가 더 지나가고. 두 번째 발표를 앞둔 나의 심경은 사진 한 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실 트라이얼 때부터 선생님이 좀 빡센 스타일이구나 싶긴 했다. 하지만 개강 이틀 차부터 무언가… 생각보다 더 stressful한 상황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어처구니 없는 문법을 틀렸을 경우.
피드백 주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 미.영.탱은 체감상 한 10분 정도를 그 사람만 물고 늘어지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안을 준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I got so many pressure...…"
"So MANY pressure? 조쉬. 너 프레셔가 몇 갠지 셀 수 있냐? (아뇨.) 너는? (못 세요.) 아마 한국인들은 셀 수 있나 보네. 너넨 원래 세는 거 좋아하잖아, 그렇지?"
"……."
"말해 봐. 프레셔 한 개는 얼만 해?"
"그… 그게."
"그래 얼간아! 불가산명사라고!"
이렇게 오분간 따발총 세례를 맞게 된다. (물론 실제로 얼간이라고 하진 않았다. 최대한 느낌을 살려보자면 이렇단 거다.)
처음에는 그렇게 혼이 나면 그냥 무안하게 웃고 넘어가곤 했는데, 나중에는 기가 빨려서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정색하고 쏘아붙이는 낯에 억지로 웃고 있는 것도 피곤하고...
무엇보다 get mad하는 기준이 원체 제멋대로다. 오픈마인드면서 미친 꼰대 같기도 하고 권위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건 뭐 열린교회 닫힘도 아니고.
어쩌면 나한테만 심술맞게 구는 것 같기도?
근데 와중에 베이킹 장인에, 투잡으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셰프로도 일하고 있어서 가끔 우리 먹으라고 이렇게 집에서 머핀이나 쿠키 같은 걸 구워온다. 끝내주게 맛있다.
이걸 정말 미워할 수도 없고.
한번은 개강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점심시간에 한국인, 일본인 애들끼리 모여 시츄에이션십 situationship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잠자코 듣다가 "한국말 중에 썸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거랑 비슷한 뜻인 것 같다" 이랬더니 미영탱이 정색을 하면서 이러는 거다.
"너 지금 우리한테 한국어 가르치는 거야? Do you think that's necessary now?"
아니 난 그냥... ㅠㅠ
아니면 이런 거. 수업 중에 영미식 아재개그 같은 걸 던진다. 그리고 우리가 안웃으면,
“좋아, 아무도 이해를 못하네. 근데 왜 물어볼 생각을 안해?"
알고 있었다고 하면,
"아니. 너 아까 못알아들었잖아."
"아닌데요, 저…(그냥 안웃겨서 안웃은 건데.)"
"Don't argue with me. 나한테 말대꾸하지 마. 나 65살이고 너보다 커뮤니케이션 잘하니까."
(하......)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수업 내내 한 마디도 못하는 학생들(주로 일본인)이 많다. 그러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용기내서 뭔가를 물어보곤 하는데, 일단 정확한 문법을 구사할 때까지 듣는 척도 안한다. 한참 후에 겨우 더듬거리며 문장을 완성하면, 답변은 이렇다.
"Seriously? 그거 우리가 십 분 전에 얘기하던 거잖아. 지금 그게 proper한 질문이야?"
"음… 아뇨."
"Nice try(그나마 기분 좋으면 해주는 말), 근데 그런 건 수업 끝나고 혼자 찾아봐."
영어선생의 짬빠가 있으니 이 불쌍한 학생이 입을 열었을 때부터 무슨 질문을 할지 다 알고 있었겠지. 그냥 얘가 진땀을 흘려가며 어떻게든 그 짧은 문장을 완벽하게 구사하게 하려고 십 분을 쓰는 거다. 이걸 참된 스승이라고 해야할지.
언제는 뭐 우리 수업에 mistakes란 없고 모두 happy accidents일 뿐이라는 둥 하더니, 오늘은 그렇게 멍청한 질문은 처음 들어봤다고 길길이 날뛴다. 저 호리호리한 몸 어디에서 저런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래놓고 이 미친 백인 노인의 횡포에 주눅 든 학생들이 대답을 소극적으로 하거나 제대로 리액션을 안하면 배움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엄청 뭐라고 한다. 자기 눈치 안보고 대드는 애들을 거의 편애하듯이 좋아하는데, 내가 뭐라도 물어볼라치면 눈 부라리면서 그게 꼭 지금 필요한 질문이냐고 한다. 왜 일본인 여자애가 수업 도중에 울면서 뛰쳐나갔다는 썰이 학교전설처럼 내려오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몇 주간 수업을 들으며 제일 많이 들어서 트라우마 생긴 말은 이거다.
"너 답 이미 아는데 왜 물어봐? 아는 거 뽐내고 싶어?"
(ㅂㄷㅂㄷ...)
열받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다. 그 전까지 나에게 질문이란 '내가 지금 수업 내용을 잘 따라가고 있으며, 공부에의 의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수단 같은 거였다.
아예 이해가 안되는 것, 진짜 궁금한 것보단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더블체크 같은 느낌으로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다. (진짜 못따라가겠으면 오히려 수업 끝나고 따로 공부함) 웬만한 선생님들은 그런 질문 좋아라 했으니까.
근데 미영탱은 아니었다. Off-Topic이면 안돼, 너무 뻔해도 안돼, 네가 이미 답을 예상하고 있는 거 더블체크할 시간에 좀 더 영리한 질문을 해라, 창의적인 질문? 아무 쓸데 없어. 모두에게 득이 되는 질문을 해.
그래서 질문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답을 알고 있는데 그냥 확인용으로 물어보는 건 아닌지. 그렇게 셀프 선별 과정에서 통과한, 진짜 필요한 질문만 하게 됐다.
이 수업을 go through하면서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또다른 포인트는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으면서 성인 대 성인의 포멀한 강의 시스템, 교수자가 나를 성인으로서 존중하는 젠틀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찬반토론을 하며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학문적으로, 상호존중예의를 갖춰서 해왔다고.
그런 나에게 이 영감탱이 가르치는 방식, 말하자면 위플래쉬⏤플레쳐 교육법은 단순 문법 교정을 넘어서 마치 내 인격을 모독하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 영화 위플래쉬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툭하면 감정적으로 몰아세워지고, 나한테 항상 crazy mad해있는 것 같고, 특히 나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공격적인 말투로 윽박지를 때. "나한테 말대꾸하지 마. 너 지금 나 가르치려드는 거냐?" 이런 말들.
미영탱이 항상 말하던 게 있었다. "너네가 어떤 압박감을 느끼는지 알고 있고, 그게 정확히 내가 의도하는 거야. Comfortable zone에서 나와, 싫으면 관둬. 근데 영어는 불편해야 늘어."
복수는 나의 힘이라고, 이 영감탱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방법은 피나게 공부해서 일취월장하는 길 밖엔 없었다. 어디 한국인의 매운 맛을 한번 보여줘?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오냐, 두고 보자.
수업 중에 감정적으로 타격 받지 않기 위해서도 노력을 많이 했다. 네가 날 미워하면 어쩔 거야? (물론 정작 미영탱은 아무런 생각 없었겠지만,) 내가 내 돈 내고 공부하러 온 건데, 내가 날 안좋게 보면 뭐 어쩔건데? 응 그만두면 그만이야. 이제 공부나 하자.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