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 3부. 첫 졸업

2023. 11 일기 모음

by 가가


10월 말 정도 됐을 땐 ESL 학생들과 어울리며 펍에 다니는 것보다 같은 반 친구 칼라와 커피를 시켜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좋아하게 됐다. 카페들이 워낙 일찍 문을 닫아서 대여섯 시면 집에 가야했지만.



한적한 다운타운 전경


칼라는 토론토에서 이미 8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하다가 온 친구라서 나에겐 마치 대선배와도 같았다. 그녀가 그동안 자신이 깨우쳐 온 해외 생활의 진리들을 전수해줬다.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물론 영어로. 잠자코 듣다가 "나도 언젠간 너처럼 영어 잘하고 싶다." 이랬더니 그녀가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인데, 나 빈말 진짜 못하거든? 그거 감안해서 들어. 나 캐나다 처음 왔을 때 비하면 너 지금 진짜 잘하는 거야."


그러면서 언젠가 자기가 캐나다에서 보낸 시간만큼 나의 시간이 지나면, 그땐 지금의 자기보다 내가 훨씬 더 잘하게 될 거라고, 그건 장담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다른 반이 된 칼라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나의 뒷통수 / 미영탱의 생일날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업을 한 달 더 연장하고 11월이 됐을 때, 나는 미영탱의 수업 방식에 완벽하게 적응하게 되었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이전 글 참고.)


조크 잘 받아주고, 질문 많이 하고, 앞에서 아무리 꼽을 줘도 "하하하~ 나도 참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넘어가면 더이상 건드리지 않고 넘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한 달을 버티고 살아남은 나를 bachelor로 대우해주기 시작한 것도 컸다. 비슷하게 멍청한 질문을 한 것 같은데 nice question이라네? 나보다 먼저 수업을 듣기 시작한 선배 친구들이 귀띔해주었다.


“원래 담임이 첫 달인 학생들을 쥐 잡듯이 잡아. 근데 왜인지 너한테 유독 더 심하게 굴더라고.”


그랬던 거군. 어쩐지 나를 너무 구박한다 했어. 나를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사라지고 마음까지 편해졌다. 그때쯤 되자 그에게 나는 애제자…까진 아니어도 취향이 비슷하고 말이 좀 통하는 old-fashioned geek의 포지션이 되었다. 반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 노래를 듣고 그의 애완 갈매기의 이름 조나단이 소설 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아는 게 나밖에 없었던 탓이다.








첫 달엔 수업이 끝나면 낯선 학원생들 사이에 부대껴 펍에서 맥주를 홀짝대거나 집에 가서 미영탱 욕을 하면서 발표 준비를 하곤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친한 친구들 무리도 생기고 할로윈 시즌을 지나며 학원 액티비티도 조금씩 참여해보았다.




할로윈 당일엔 다같이 코스튬 입은 채로 점심도 먹으러 가고 호박 카빙도 해봤다. 수업이 끝난 후엔 칼라 손에 이끌려 Trick or Treat을 하러 가기도 했다.


"What are we? 5 years old??"

"It'll be fine. You know white people can't tell how old Asians are anyway."


캔디 타먹기엔 너무 장성한 어른 아니냐는 나에게 칼라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South Cambie


마음이 앞서 해가 지기도 전에 무작정 찾아갔던 탓에 결국 간식은 못받았지만. 칼라의 밴쿠버 버킷리스트 하나는 이뤘으니 됐다.






어느덧 학원 두 달차.


이제는 지각도 한다. 늦을 것 같다고 메일 보내놓고 더 자다가 점심시간 30분 전에 등교했더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머쓱하게 지각해놓고선 퀴즈를 다 맞추는 나를 보며 미영탱이 "확실히 오래 자니까 머리가 잘 돌아간다"며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친구들의 졸업 애프터 파티로 갔던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다음날 점심



예전에 칼라가 이런 얘기를 해줬다. 원래 타국살이를 할 때 homesick이던 슬럼프던, 그런 우울감이 딱 3-6-9개월 주기로 온다고. 그때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서 "정말? 신기하네~" 이러고 잊어버렸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영어도 영 느는 것 같지가 않고, 이유 모를 답답함이 들길래 칼라한테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I feel like I'm stuck!"), 나더러 캐나다 온지 얼마나 됐냐는 거다.


“지금 12월이니까… 한 세 달 됐지?"

“음. 내가 그때 말했잖아. 지금 딱 그런 거 올 때야."


근데 이런 거지. 우리는 우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늘고 있다고. 언젠가 그걸 깨닫는 순간이 올 거라면서 다른 사람, 혹은 내 기대치와 너를 비교하면서 조바심 가질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 이대로 꾸준히 하다보면 문득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하는 날이 오겠지. 빨리 그 순간이 오면 좋겠다.



슬슬 겨울내가 나는 밴쿠버 곳곳






그렇게 순식간에 두 달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졸업식 전날 밤.


며칠 전 마지막으로 받은 프레젠테이션 피드백을 다시 펼쳐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원작의 영화들>을 주제로 발표한 날이었다.




웰던이라니!


원래 이런 거 잘 안써주던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영탱한테 칭찬 받으니까 더 뿌듯했다.


이것도 어쩌면 눈에 보이는 내 성장의 척도.








밴쿠버에서의 첫 졸업식은 역시나 특별할 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의 졸업 때처럼 미영탱의 수제 티라미수를 나눠먹고, 시덥잖은 이야길 나누다가 본캠으로 갔다.




감동적인 스피치도 하고, 미영탱과 사진도 찍고 디플로마도 받았다. 가운과 학사모를 걸치고 포토월에서 친구들과도 다함께 사진을 찍었다.


애프터 파티를 하러 자주 가던 단골 펍에 가서 테킬라만 미친듯이 네다섯 샷을 연속으로 마시고, 저녁에는 친구네 아파트에서 피자를 먹으면서 마피아 게임을 하고 놀았다.




오늘 미술관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점등한다고 했었는데, 노느라 점등식을 놓쳐서 그냥 비 맞으면서 걸어가서 반짝이는 조명들을 구경했다. 밤에는 칼라와 함께 이자카야에 가서 진짜 맛있고 더럽게 비싼 작은 디쉬들을 먹었다. 칼라가 사줬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 오늘 받은 최종 성적표를 펼쳐보았다.




피드백에 또 갈매기 Jonathan 얘기가 있다. 그게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나 보다.



S프로그램에서 보낸 지난 두 달을 되돌아보니 참 감회가 새롭다. 첫 이 주동안 미영탱 때문에 열받아서 아래 짤처럼 분노의 일기를 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덕분에 영어도 정말 많이 늘긴 늘었지만 복수의 힘 무엇보다 칼라를 포함한 좋은 친구들도 사귀었고, 처음으로 소속감도 느꼈고, 밴쿠버란 낯선 도시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캐나다 와서 적응 못하고 한 달만에 돌아가면 어쩌나, 이런 고민을 할 때도 있었는데. 덕분에 두 달 잘 버텼다.



그리고 미영탱에게 받은 개인 레슨 목록


- 타국에서 혼나는 거, 미움 받는 거 무서워하지 않기

- 내 인생에 도움 안되는 화풀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 항시 지녀야 할 태도: 뭐 어쩔?

- 부당한 지적에 아방한 태도로 일관하기 등등.


인생의 노하우를 많이 얻어간다. 마지막엔 나름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니 그것도 하오하오.



툭하면 가서 바닷바람을 쐬고 하던 English Bay Beach



그리고 이건 그 이후의 이야기.


졸업하고도 몇 달이 지난 뒤에, 이미 졸업한 친구들과 함께 학교의 애프터 파티에 찾아갈 일이 생겼었다. 졸업 뒤로는 미영탱과 연락을 안하고 있던 터라 그를 만나는 것도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왜인지 엄청 떨리는겨. ㅋㅋ


근데 '뭐 있어?' 하고 선생님끼리 모여서 맥주 홀짝거리는 테이블에 뚜벅뚜벅 찾아가서 미영탱 보며 왜이리 많이 마셨냐고 너 얼굴이 빨갛다고 막 놀리면서 반갑게 인사했는데, 그가 진짜로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리디아! 너 진짜 많이 늘었다!" 이러는 거다.


그때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제서야 정말로 졸업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 첫 번째 어학원 이야기 디 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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