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9를 가리키는 시계의 작은 바늘을 민지는 멍하니 바라봤다. 9시. 출근한 지 12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민지는 끝내야 할 업무의 반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직시하고 나서야 민지는 기지개를 켰다.
있는 힘껏 허리를 뒤로 젖히고 양팔을 뒤로 앞으로 휘휘 돌려도 뭉친 스트레스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이러려고 공부한 건 아닌데.
라는 말을 민지는 벌써 수 백번 째 되뇌는 중이었다. 하지만 민지는 또 이내 버릇처럼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은 없지 않냐고. 이만큼 밥벌이를 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중얼거렸다. 분개할 열정을 갖기엔 민지는 너무 지쳐있었다.
띵동.
알람이 왔다. 민지가 세상 가장 반가워하는 알람, 택배 알림 문자였다.
민지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자리에 일어나 1층 택배 보관함으로 내려갔다. 집에서 받던 택배를 회사로 받기 시작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민지는 고 팀장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동기와 기분 나쁜 언쟁이 있을 때, 갑자기 우울감이 밀려올 때마다 택배를 찾으러 내려갔다. 하늘색 봉투를 기분 따라 뜯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요즘엔 세상이 좋아져서(?) 천 원 짜리도 택배를 보내주는 곳이 있었다.
마약같은 택배. 출처: wordrow이번 택배는 꽤나 묵직했다. 민지는 자신이 주문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못하고 상자를 앞뒤로 흔들었다. '취급주의'라고 적혀 있는 걸 봐서는 유리병 같은 깨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뭐지.
민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곰곰이 생각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헤어진 남자 친구의 선물일까라는 기분 좋은 상상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못 이기는 척 만나자고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의 선물이라면 민지가 평소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향수였을 터였다.
급하게 일어나느라 제멋대로 나동그라져있는 의자를 추슬러 앉았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커터칼로 테이프를 뜯는 순간 알았다.
그것은 남자 친구가 아닌
몇 년 간 잊고 지냈던 지인의 선물이었다.
누런 박스를 개봉하자마자 퍼져 나온 향은 카모마일 저먼과 베르가못, 유칼립투스였다.
민지는 몇 달 동안 만성 두통에 시달렸다. 약을 먹어도 낫질 않았고,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MRI를 찍어 병명을 찾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날도 민지는 지끈거리는 편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던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민지도 몇 걸음 뛰었다. 하지만 이내 멈췄다. 머릿속에 쿵쾅거리는 울림이 보폭을 빠르게 할수록 더 크고, 강하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민지는 차양이 내려진 나무 문 앞에 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데 어디에선가 향긋하고 감미로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냄새가 나는 곳은 민지가 선 뒤쪽이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다. 수업을 하는 듯했다. 무슨 말들을 나누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문틈에서 향이 더 강하게 흘러나왔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데 어디에선가 향긋하고 감미로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냄새가 나는 곳은 민지가 선 뒤쪽이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다.
수업을 하는 듯했다. 무슨 말들을 나누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문틈에서 향이 더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익숙한 향이었다. 민지는 그 향을 맡자마자 그간 머릿속에서 북을 두드려대던 원숭이가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민지의 본능이 꿈틀댔다. 두통을 없앨 수만 있다면야.
공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거 무슨 향이에요?"
'민지. 오랜만이지? 카톡에 너의 생일 알림이 떴길래 그걸 핑계로 글을 적어. 취업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잘 됐다. 축하해. 오늘 공방에서 오일 하나를 만들었어.
카모마일을 베이스*로 쓰다 보니 너 생각이 많이 나서. 너는 특이하게도 카모마일 로먼이 아닌 저먼에 늘 흥분했었지. 남들이 선호하는 건 싫어하는 청개구리 같다랄까. 미들*엔 내가 좋아하는 라벤더를, 탑*엔 유클립투스를 넣었어.
*에센셜 오일의 향을 결정짓는 것은 3가지다. 그걸 탑, 미들, 베이스로 나누는데 탑(노트)은 향을 밭았을 때 처음으로 느껴지는 냄새, 미들(노트)은 톱의 향이 세 시간 정도 지난 뒤 나타나는 향, 그리고 베이스(노트)는 잔류 향으로 피부에 지속되는 향을 뜻한다.
지칠 때마다 한 방울씩. 알지? 조급하고 피곤했을 너의 하루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축하해. 승혜.
잊고 있었다. 승혜는 그 아로마 공방에서 만난 5살 연상의 언니였다. 그녀와 민지는 아로마 공부를 하면서 매구 가까이 지냈다. 그녀는 라벤더를 좋아했고, 민지는 카모마일 저먼을 좋아했다.
라벤더는 독성이 없이 깨끗하고 차분한 향이다. 특히 스트레스, 두통 치료에 효과적이며 여성의 경우 생리통 완화에 도움을 준다. 프랑스, 스페인, 고산지대에서 핀다. 꽃봉오리에서 향을 추출. 학명은 lavandula angustifolia.
카모마일 저먼은 산뜻한 향이 특징이다. 특히 우울, 불면, 히스테리, 불면, 과민증 등의 신경 장애에 효과적이다. 프랑스, 모로코, 스페인, 이집트에서 주로 핀다. 학명은 matricaria recutita.
민지는 승혜가 보내온 아로마 오일을 엄지 손가락에 묻혔다. 귀와 눈꼬리 사이의 부드러운 부분, 관자놀이에 대고 압박을 가하면서 작은 원을 그리며 마사지했다. 귀 뒤쪽 유골 뼈를 찾아 목을 따라 부드럽게 따라 선을 그렸다. 그리고 눈과 눈 사이의 콧등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랬더니 무거운 눈꺼풀이 살짝 떠지는 것 같았다. 조급하게 쿵쾅대던 심장 박동도 서서히 느려졌다.
"민지 씨 향수 바꿨어? 되게 좋은 냄새나네."
고 팀장이 사무실을 들어서며 말을 건넸다.
"맞아. 나 아까부터 묻고 싶었어. 향수 뭐 써요?"
샤넬 넘버 파이브니 에르메스의 트윌리 데르 메스니 하는 고급지고 비싼 향수들을 뿌렸을 땐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거 진저를 베이스로 한 아로마인데, 팀장님, 차장님 한번 써보실래요?"
향기만큼 사람의 기분을 순식간에 좋게 하고, 분위기를 바꾸는 것도 드물었다.
민지는 팀장에게 어울릴만한 아로마향을 추천해주면서 생각했다.
첫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모다.
하지만 상대에게 가장 진한 인상을 남기고 싶다면, 외모보다 더 열심히 관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냄새다.
특히 후각은 대뇌와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인지기능, 면역기능, 정서 기능에 관여한다. 실제로 인간이 일상에서 겪는 경험의 75%는 냄새에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 복장, 헤어스타일, 화장법, 매너 등의 방식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자신에게 풍겨져 나오는 냄새부터 관리해야 한다.
아무리 깨끗하고 멀끔한 이미지의 사람이라도 걸레 빤 냄새나 입냄새가 난다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리 없지 않겠나.
특히 하루의 절반 이상을 같이 보내는 사무실에서는 강하지 않고 은은한, 나만의 독특한 향기로 자신의 이미지를 포지셔닝할 필요가 있다.
신입사원일수록, 이미지가 중요한 위치, 대인관계가 중요하 자리일수록 냄새 관리는 필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값비싸고 유명한 혹은 유행하는 향수를 뿌리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을 '매력 있고', '왠지 호감이 생기고', '왠지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대중적 향수는 금물이다.
대신 아로마 오일을 추천하고 싶다.
몸에 바르거나 뿌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사무실 자기 자리에 아로마 향이 나는 오일을 올려놓는 것을 추천한다.
향 하나로 바뀌는 것이 기분이고 분위기다.
피곤할 때, 우울할 때, 힘들 때, 아플 때 위로받을 수 있는 향이 가까이에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회사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당신을 바라보는 직장 동료도, 상사도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