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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태어남을 당해 억울하다고?

by 권도연

태어남을 당해 억울하다고?


라라의 말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동네 아이가 통화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솔(가명)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보아 온 친구다. 라라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인사성 밝고 엄마 아빠에게도 순한(?) 딸인 듯 보였다.

비가 세차게 쏟아붓던 날이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이솔이가 탔다. 아이는 우산 없이 비를 쫄딱 맞아 온몸에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씩씩댔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 민망했는지 평소에는 자주 알은체를 하던 아이가 나를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 젖었어. 개짜증나. 너 테스트 잘 봤어? 나 망했는데. 혼났지 당연히. 괜히 태어났어. 당한 거지. 억울해. 너도?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이솔이의 말들이다. 전화기를 들고 친구와 통화하는 이솔이를, 나는 놀라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라고? 태어남을 당했고 억울해?

안 그래도 점심 식사 자리에서 아들 때문에 소아정신과에 다닌다는 직장 동료를 만난 터였다.

언제나 밝게 인사를 건네던 이솔의 엄마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저 이야기를 들었다면 얼마나 큰 충격일까.

남인 내가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말이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아파트 단지 내로 구급차와 앰뷸런스가 요란하게 들어왔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 잠을 설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앞 동, 어느 집에서 중학생 아이가 몸을 던졌다고 했다. 체념 섞인 말, 아무 감정 없는 표정의 이솔이가 떠올랐다. 그 아인, 괜찮을까.




<4세 고시, 그거 나도 해봤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정신 질환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1∼9세 아동은 9만 3655명이다. 2020년 6만 2399명에서 4년 만에 50.1% 늘었다. ADHD 등 운동 과다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 적응장애 등 소아 정신건강 질환 진료 인원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선행 학습과 디지털 기기 노출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얼마 전에는 영어 학원 입학을 위해 네 살 때부터 조기 영어 교육을 시킨다는 ‘4세 고시’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라라의 친구들 중 3명이 모두 5살에 영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해 지금은 사립학교에 다닌다. 왜 라라는 안 했냐고? 시험 봤다. 떨어졌냐고? 아니, 6살에 동네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영어 유치원에 보냈다. 하지만 3달 후 그만뒀다.

이유는 나 때문이다. 좋게 포장하면 나의 ‘교육 철학’과 맞지 않아서고,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셔틀비, 활동비, 특수교육비(?) 명목으로 걷어가는 비용에 대한 구체적인 사용처를 문의했으나 속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영어 단어 밑에 한글로 받아 적는 걸 매일 발견해야 했다. spare란 단어 밑에 ‘여분의’라는 뜻을 적었더라. 여분의? 여분의? 8살 애가 여분의 라는 말을 안다고? 알아도 spare 란 단어를 배우면서 여분이란 말을 떠올린다고? 이게 언어학습이냐? 암기지!


다른 무엇보다 유치원 점심이 매우 부실했다. 어느 날, 라라가 급식에서 지급되는 옥수수 4분의 1조각을 먹고 더 먹고 싶어서 선생님한테 하나만 더 달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한 명당 하나씩만 먹을 수 있다고 안된다고 거절한 거지. 다른 엄마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있는 ‘별 일 아닌’,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감히 내 딸에게 옥수수 하나를 안 줘?’가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이는 매일 배를 곯았다. 어느 날은 내가 보는 앞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익지도 않은 고기를 손으로 집어 먹는 게 아닌가. 식비만 한 달에 수 십만 원을 내는 곳이다. 공짜로 지급하는 공립 유치원의 점심보다 반찬 가짓 수와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 결론은 당연했다.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안 보낸다 안 보내!


아이를 일반 유치원으로 옮기자 말들이 많았다. 라라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면 ‘라라 영유 적응 못해서 나온 거죠?’ 하는 질문을 매번 들었다. 상황을 설명하면 내가 유별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 들어가기 힘든데 아깝지 않냐’는 말도 들었다. 지금 라라는 영유를 졸업하고 영어로 대화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너 영어 쓰지 마, 나랑 한국어로 대화해’를 연발한다. 후회하냐고? 나중에 영어 입시가 걱정 안 되냐고? 전혀. 라라는 자신이 원하는 ‘영어 뮤지컬’을 다닌다. 그곳에서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언어를 익힌다. 라라에게 영어는 이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다. 부르는 거고 흉내 내는 거다. 이것으로 만족한다. 8살에게 언어는 그런 것이어야 맞다.


이솔이도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편해하는 아이다. 웃음 대신 무기력, 호기심 대신 체념이 깃든 얼굴을 보며 나는 궁금했다. ‘이 아이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단계까지 올 만큼, 무엇이 그를 밀어붙였을까?’




< 오지라퍼의 참견 >



“너, 이솔이 언니 알지?”

“응, 언니랑 피아노 학원 같이 다니잖아.”

“맞네. 언니랑 얘기해 본 적 있어?”

“있지. 근데 언니 피아노 학원에서도 핸드폰만 봐.”

“폰보고 뭐 하는데?”

“아이브 장원영 춤추는 거 보거나 친구들한테 카톡 보내.”

“말해봤다며, 무슨 말했는데?”

“언니 콩쿨 무슨 곡 하냐고 물어봤는데. 안 한대.”

“왜?”

“저번에 우수상 밖에 못 타서 실망했대. 그래서 피아노 학원도 그만 둘 거래.”

“언니 영어 뮤지컬도 그만둔다지 않았어?”

“응, 재미없대. 난 재밌는데. 재미없다는 건 거짓말일 거야. 언니는 마틸다를 하고 싶어 했거든. 근데 그거 지원 언니가 하기로 했어. 언니는 마틸다 친구1 역할을 맡았어. 실망한 거 같아.”


반복되는 비교와 실패 경험, 부모·교사의 기대와 사회적 메시지들이 누적되면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인지적 기대를 형성한다. 이 기대는 동기 저하, 회피 행동, 그리고 우울 감정과 연결된다. 아이들에게 이 현상이 일어나면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패배감이 학습되어 도전 자체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12살에 도전 실패라니. 앞으로 도전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한데. 걱정스러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학습된 무기력이 단순한 행동적 위축을 넘어 정서적·인지적 패턴으로 고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솔이의 “내가 왜 태어났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는 자기 통제의 상실, 비교의 굴레, 자기 개념의 붕괴가 함께 들어 있다. 큰일이다.

오지랖을 부릴 때가 왔다.



뮤지컬 공연이 있던 날, 나는 연차를 내고 아이 공연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솔이의 엄마를 만났다.

이솔이 엄마는 작년, 아이의 옷이 작아졌다며 내게 예쁜 원피스 몇 벌을 준 적이 있다. 나는 그 보답으로 그녀에게 케이크를 선물했다.


“그때 케이크 어땠어요? 제가 딸기 맛은 안 먹어봐서 궁금해서요.”


말도 안 되는 핑계. 안 먹어보긴 맛 별로, 종류별로 다 먹어 본 빵순이 주제에.


“너무 맛있던데요. 그날 이솔이랑 제가 애 아빠도 안 주고 자리에서 순삭 했어요.”

“어머 케이크를 드실 줄 아는 분이시네.”


아이스 브레이킹은 요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기 오지랖일 수 있는데 제가 이솔이 엄마랑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는 그녀에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해일 수는 있지만 아이가 힘들어하는 건 분명한 거 같다고. 피아노 학원도 뮤지컬도 그만하고 싶어 하던데 라라가 좋아하는 언니가 그만둔대서 많이 서운해한다고. 이솔이 엄마, 놀란다. 아이가 학원을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몰랐단다. 이솔이가 학원에 대한 불만이나 콩쿨, 뮤지컬 공연에 대한 실망감, 힘듦을 표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아이에게 어디에서 들었다더라 티는 내지 말고 한 번 슬쩍 학원 생활 어떤 지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 피아노 원장 선생님이나 뮤지컬 선생님께도 아이가 요즘 어떻게 다니는지 물어보고요.”

“그러게요. 제가 요즘 바빠서 학원에 학원비만 결제하지 선생님하고 상담해 볼 생각을 못했네요.”


‘태어남을 당해 억울하다’는 말은 어른이 만든 사회적·정서적 조건의 반영이다.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느끼게 한 책임은 단지 아이에게만 있지 않다. 부모·학교·사회가 함께 만든 환경이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에필로그처럼 쓰는 엄마의 마음>



오늘 엄마는 깜짝 놀랐지 뭐야.

마틸다 친구2 역할을 그렇게 잘 소화해 낸 건 라라가 유일할 거야.

라라가 “No! It’s not fare!” 할 때 허리에 손을 탁 얹고 인상을 팍 찌푸리고 발을 구르던 모습은 정말 멋졌어.

마틸다가 하나도 안 보이던걸. 엄마 눈엔 라라의 목소리랑 표정만 들리고 보였어.

라라 덕분에 엄만 마틸다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지 알게 됐네!

고마워.

너를 낳아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태어나줘서 고맙고, 재미있고 즐겁게 뮤지컬을 해내서 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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