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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츄파춥스 하나에도 행복한 라라처럼

<너는 나처럼 살지 마>

by 권도연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회사 건물의 회색 벽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하루가 끝난 듯한 피로가 몰려온다. 회사 현관에 들어서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의 표정부터 이미 하루를 다 살아낸 사람들 같다. 커피를 들고 있는 동료의 눈은 피곤에 절어 있고 또 누군가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오늘 하루를 견딜 힘의 원천을 찾고 있지만 시원찮아 보인다. 그 무리에 섞여 있으면서 나는 점점 더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떨쳐낼 수가 없다.


회의에서 열심히 의견을 내고 보고서를 밤늦게까지 붙잡고 관련 이슈들을 시시때때로 챙겨가며 노력을 해봐도 돌아오는 건 허무함, 허탈감, 자괴감뿐이다. 오늘은 한 선배가 나에 대해 험담을 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걔는 제멋대로야. 선배를 물로 보는 애지. 없는 말도 지어내고 나한테는 인사도 안 하더라. (내가 언제? 없는 말이란 게 대체 뭐지?) 늘 그렇듯,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게 사내 소문이다.


누군가는 생명을 구하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무언가를 이뤄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지만 나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을 오늘 만도 수백 번 곱씹었다. 월급을 받으니까 그걸로 된 건가.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열심히 봉사 활동을 다니고 시험 준비를 하고 공부를 하고 글을 썼던가.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지.

“우리는 행복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은 끊임없이 행복을 찾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심리학에서는 ‘큰 의미’만을 좇을수록 삶은 공허해진다는 ‘의미의 역설(paradox of meaning)’이란 개념이 있다. 큰 의미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불행을 키운다는 건데, 난 좀 억울하다.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찾았다고 이러나. 상무란 직급으로 경력 점프 업해서 이직한 동기, 코인으로 성수동 트리마제에 투자해 월급 대신 월 500을 계획한다던 옆 부서 후배만큼은 아니더라도 실력 인정받고, 후배에게 존경받고, 선배에게 이쁨 받고 싶어 하는 게 무슨 큰 바람이라고.


팡세의 책을 덮고 일상과 철학을 연결하는 데 재주가 있는 작가 알랭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뒤적인다.

‘일의 진정한 보상은 돈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세상에, 나의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오히려 욕이나 먹고 해가 되는 존재인 거 같은 나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고 있지 않는 게 맞는 거였어! 젠장.



<그래, 행복이 별거냐. 츄파춥스가 별거지.>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편의점에 들러 피로회복제 하나를 들고 나오려는데 라라가 졸졸 따라왔다.


“엄마, 나 오늘 책도 한 권 다 읽었는데 사탕 하나 사주면 안 돼? 응? 응? 응?”

“다 읽은 건 잘한 일이지만 사탕을 사줄 정도는 아닌데…”

“사탕을 사주면 내가 엄청 행복할 거 같은데 나의 행복을 위해 사주면 안 돼? 응? 응? 응?”


요즘 라라의 화법은 이런 식이다.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탕을 사주고 인형을 사주고 뽑기를 허락해야 한다고 한다. ‘앤이 어깨가 풍성한 원피스를 입게 된다면요, 너무너무 행복해서 하늘에서는 꽃가루가 날리고 어깨에서는 날개가 솟는 느낌일 거예요!’ 매우 요란하고 과장된 감정 표현의 달인인 빨간 머리 앤 만화영화를 주야장천 보더니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하지만 나는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이 엄마가 그까짓것. 하늘에 별도 못 따다 주는데 뭘. 하며 하나씩 허락하고 만다.

사실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매일 직장에 매달려 일하는 엄마가 가진 부채감 때문이지만.


라라는 300원짜리 사탕을 받아 들고 야무지게 까더니 입에 쏙 넣고 탄성을 지른다. 이 맛이야 엄마! (유튜브 좀 그만 보여줘야겠다) 라라는 정말 세상 다 다 가진 사람처럼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행복해한다.

어제는 비눗방울을 쫓아다니면서 두 팔을 휘두르며 환호했고, 그제는 길가에 핀 들꽃을 발견하고는 보물처럼 들여다봤던 아이다.

그 웃음을 보는데 슬쩍 눈물이 난다. 팡세 말고 보통 말고, 존경해마지 않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이 떠오른 건 활자 중독자의 오랜 버릇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일명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행복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순간에 깃든다는 말을 그가 처음으로 했다. 사람들은 이 행복이 무엇인지 그 가능성을 이미 다 알고 겪고 있었으면서 하루키가 인류 최초로 행복의 존재를 처음 발견했다는 듯이 환호했다. 인간이 이리 단순하다. 마찬가지로 나도.


심리학 연구도 같은 결론을 보여준다. 에몬스와 맥컬러프의 연구에서 ‘감사 일기’를 쓴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이 훨씬 높았는데, 그들이 기록한 건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오늘 날씨가 맑았다’, ‘저녁에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 같은 사소한 일이었다는 것. 작은 것을 바라보는 눈이 행복을 키운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사실이다.


그래, 행복은 어떤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묻어 있는 작은 경험들에 의해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일 테다.

요즘 유행하는 ‘마인드 풀니스’도 같은 개념이다. 현재의 지금에 집중하라는 것. 우리가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지금 여기’ 대신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행복은 큰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가는 평범한 길 위에 있는 것이니까. 아이의 웃음, 커피 한 잔, 저녁 바람. 이 것이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잠들기 전, 아이와 대화하기>



“라라는 오늘 가장 좋았던 게 뭐야?”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루틴은 바로 이것이다. 잠들기 바로 직전에 서로 오늘 가장 좋았던 순간을 나누는 것.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문제는 라라가 아니라 내게 있었다.

'좋았던 것' 그건 대체 생각해 내기도 기억해 내기도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결국 고민하다가 꺼낸 건 매번 똑같다. 출근길에 마신 달콤한 바닐라 라떼, 점심에 먹은 잠봉 샌드위치 정도. 이제 라라는 나의 좋았던 순간을 잘 듣지도 않는다. 어차피 들어봤자 또 커피 아니면 먹는 얘기뿐이니.

하지만 나는 라라의 말이 매일 기대가 된다. 아이의 순간은 매일 더 사소하고 더 의외인 순간이 가득하다.


“친구가 내가 빌려 준 사인펜을 쓰고 돌려준 거.”

“피아노 학원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끊기지 않고 한 번에 쳐낸 거.”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똥을 네 번이나 싼 거.”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순간이다. 아이는 커갈수록 가장 좋았던 순간 말고도 가장 슬펐던 순간도 이야기한다. 요즘에는 슬펐던 순간이 더 많다. 친구랑 말다툼한 거, 친구가 보건실에 같이 안 가준 거, 급식실에서 탕수육을 자신만 2개밖에 못 받은 거. 이 참에 나도 라라에게 나의 슬펐던 순간을 얘기해 줬다.


“누가 엄마 보고 나쁘다고 싫다고 했대. 그래서 속상해. 엄만 그 사람 좋은데.”

“나도 그런 적 있어.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운 적도 있어.”

“엄만 어른이라 회사에서 울기엔 좀 창피해. 그래서 계속 한숨만 쉬었어. 회사 가지 말까?”

“아니. 나도 학교 가기 싫은데 가. 왜냐면 그 친구랑 상관없이 난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하고 밥도 먹고 놀고 공부하러 가는 거니까.”


그 말이 맞다. 내가 일을 하러 가는 거지 그 선배의 마음에 들려고 출근하는 건 아니지.


“그래서, 네가 싫다는 친구한테 왜 그런지 물어본 적 있어?”

“아니, 그냥 알고 싶지 않아.”

“왜? 궁금하지 않아? 엄마는 왜 그 사람이 엄마를 오해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그걸 내가 알게 된다고 걔가 날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걔 마음은 걔 마음이고. 내 마음은 내 마음이니까.”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라라에게 '타인의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관련해 글도 썼다. 그래놓고 나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라는 배운 걸 이렇게 또 써먹는다.


타인의 평가와 오해는 애초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행복을, 시간을 저당 잡혀 시간을 쓰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휘둘리는 대신 오늘 내가 발견한 작은 행복을 선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8살인 라라가 하는 것을, 마흔이 넘은 내가 못해서, 아이에게서 다시 배우고 있다.



< 네가 날 싫어한다면, 나도 널 싫어할게(?) >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 문 앞에 섰다.

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르다. 회사 건물의 회색 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회사라는 공간이 내 존재의 의미를 전부 규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 나를 싫어한다는 선배를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어차피 나는 내 역할을 하기 위해 출근을 한 것이니까.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스쳐 지나가는데 편의점 앞에서 라라가 사탕을 입에 넣고 “이 맛이야, 엄마!” 하고 웃던 모습이 겹쳐졌다. 그 웃음을 떠올리자, 오늘 하루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날처럼 느껴졌다.



내일도 여전히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에 들어서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 나는 행복한 생각만 하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내 곁에서, 아이의 입속에서, 이미 달콤하게 녹아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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